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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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다시 시작이다

탄핵안 가결은 민심이 이룬 것
민주주의 성숙시키는 계기 돼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어제 국회에서 가결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과는 그 무게가 다르다. 당시 정치권 주도로 탄핵이 추진됐던 것과 달리 수많은 ‘촛불 민심’이 박 대통령 탄핵의 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국민 주권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탄핵 사안 역시 그 때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중하다. 대통령과 공적 조직이 한 민간인의 농단에 무력화됐다는 사실에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탄핵안 가결이 “국민의 승리”라는 찬사는 합당하다.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적 절차에 따라 처리됐듯이 헌법재판소는 앞으로 180일 이내에 탄핵심판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박 대통령의 권한 행사는 정지됐고, 정부는 국무총리인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가 됐다. 두 달여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마비되다시피 했던 국정이 탄핵 사태로 주저앉는 일이 없도록 각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탄핵안 처리를 이끈 야권은 물론 여당, 정부 공직자들의 각성과 책임감이 요구된다. 박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 직후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국회와 국민의 목소리를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특검 수사와 탄핵 심판 절차에도 성실히 응해야 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국내외 경제 기관이 줄줄이 내년 성장 전망치를 낮출 정도로 경제 여건은 먹구름인데 이를 헤쳐나갈 컨트롤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호전적인 북한 김정은 체제는 리더십 공백을 틈타 호시탐탐 도발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안보, 경제, 통치의 위기를 극복할 정부·정치권의 협치 시스템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 탄핵은 미래의 시작”(김동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라는 말대로 당리가 아닌 국익을 앞세우는 야권의 자세 전환이 시급하다.

우리 국민들은 국가 위기 때마다 단합된 힘을 보였다. 참혹한 전쟁의 포화를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를 일군 것도, 1998년 외환 위기의 파고를 넘은 것도, 2008년 전 세계 금융 위기와 북한의 잇단 도발 사태를 극복한 것도 국민의 힘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실망, 분노로 촛불을 든 시민들이 주말마다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 곳곳을 채웠어도 불상사 하나 없었던 평화로운 집회가 ‘질서 있는 탄핵’을 만들었다. 온 세계가 경탄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탄핵안 가결 이후에도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 저마다 일상을 회복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할 때다.

이제 최종적인 탄핵 결정권은 헌재로 넘어갔다. 앞으로 헌재 주변에서 촛불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지만 탄핵 심판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 재판관의 법률가적 양심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절차적 정당성과 엄정성이 보장돼야 국민 모두가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도 헌법을 수호하는 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지켜야 할 것이다. 다만 국가 공백 사태가 장기화하지 않도록 탄핵안 심리를 서둘러 빠른 결정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다. 헌재 결정이 무엇이든 대통령과 정치권, 국민이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법치국가의 기본이다.

이번 탄핵안 가결은 박 대통령 개인의 진퇴를 정하는 수준을 넘어 민주주의를 한층 성숙시키는 계기가 돼야 한다. 평화적으로 ‘주권’을 행사하고 그 뜻을 관철한 국민적 에너지를 제도화해야 한다. 그 과제를 해결할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 내년 대선에만 집착하는 행태는 근시안적이며 정략적이다. 박 대통령까지 6명의 대통령 모두가 좌절한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실패한 제도라는 게 분명해졌다. 승자 독식의 정치는 권력의 부패, 무한 갈등을 낳았다. 이런 제도로는 누가 차기 대통령이 돼도 ‘낙제 성적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탄핵안 가결 이전과 이후의 정치문화는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광장의 촛불이 진정한 ‘시민혁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국회 차원에서 개헌을 포함한 국가 시스템의 재편을 공론화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