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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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탄핵 정국에 드리운 12.12 그림자…군 '불신' 사라질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군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언급하기 꺼려하는 질문이 있다. 바로 12.12 쿠데타에 대한 질문이다. 평소에는 기자들의 문의에 성심성의껏 답변하던 군인들도 “12.12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손사래를 치거나 얼버무리는 등 말하기 싫다는 의사를 숨기지 않는다. 그나마 답변을 하는 군 관계자들도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 외에는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는 것을 꺼려한다.

12.12 쿠데타에 대한 질문을 불편하게 여기는 군인들의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치권력 공백기를 틈타 국정을 장악하려 했던 일부 정치군인들이 일으킨 1961년의 5.16과 1979년 12.12 쿠데타는 명예와 국민의 신뢰를 중시하는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군이 정치 현안에 거리를 두며 국가안보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자 국민들은 군의 노고에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지만 ‘쿠데타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기 전인 7일 서울 시내 한 건물에서 시민이 반쯤 가려진 커튼 너머로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다. 남제현기자

이같은 상황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이 확산되자 일각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 “계엄령이 선포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군은 “국내 상황에 관계없이 북한만 바라보겠다”며 정치 현안에 선을 그었지만 세간의 의혹은 여전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면서 의혹은 단순한 억측으로 마무리되는 분위기지만 그 이면에 자리잡은 군에 대한 불신을 되돌아보고 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정립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軍 “북한만 바라보며 대비태세 강화”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이 확산되던 지난달부터 군 당국은 정치 현안에 거리를 두면서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는 것을 경계해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9일 오후 소집된 전군주요지휘관 화상회의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9일 박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직후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전군에 감시 및 경계태세 강화를 지시하는 한편 북한군 도발 징후를 조기에 식별해 현장에서 응징할 수 있도록 부대별 태세를 유지하도록 했다. 합동참모본부 청사에서 전군주요지휘관 화상회의를 주재한 한 장관은 “북한이 국내 정치 불안정과 미국의 정권 교체기를 틈타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국민에게 든든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빈틈없는 국방태세 유지에 더욱 만전을 기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순진 의장도 긴급 작전지휘관 회의를 열어 “지휘관을 중심으로 전 장병이 현 상황의 위중함을 인식하고, 확고하게 대비태세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최근 북한군은 주특기훈련과 사격훈련 등 연례적 성격의 동계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도발 징후 등 특이동향이 포착되지 않는 한 대북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이 상향 조정될 가능성은 낮다.

국방부는 탄핵안 가결에 따른 정치적 혼란에 관계없이 임무수행에 전념한다는 방침이지만 ‘군심’ 단속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지난 1일 진해서 열린 해군 사관후보생 임관식에서 신임 장교들이 도열해 있다. 해군 제공
우선 내년 4월 이뤄질 대장급 장군 인사는 연기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순진 합참의장과 같은 해 9월 취임한 장준규 육군참모총장, 정경두 공군참모총장은 내년 4월 취임 1년6개월째를 맞는다. 참모총장 임기는 2년이지만 임기 만료 전 교체된 사례가 많아 탄핵 정국이 아니었다면 내년 4월 인사에서 대장급 인사가 단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안정적 국정 운영을 최우선해야 하는 현실적 한계와 헌법재판소 심판에 따라 박 대통령이 복권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 황교안 권한대행이 군 수뇌부를 교체하는 인사를 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다. 실제로 지난 2004년 고건 권한대행체제에서도 4월 장군 인사는 5월14일 헌재의 탄핵안 기각 결정으로 노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이후인 5월 말 인사가 단행됐다. 하지만 인사가 늦어질 경우 인사대상자에 대한 투서 등으로 군심이 동요할 우려도 제기된다. 군 내부 인트라넷인 ‘국방망’ 해킹 사건 조사와 주한미군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 등 현안들도 남아있어 “북한만 바라본다”는 국방부의 태도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 최순실 파문이 건드린 군에 대한 불신

군은 최순실 파문이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대비태세 확립을 계속 강조하며 정치 이슈와 거리를 뒀지만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쿠데타나 계엄령 등에 대한 루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행된 지 수십년이 넘은 계엄령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정치권에서도 화두가 되는 등 확산 추세를 보였다.

현재 상황에서 무력을 동원한 군의 정치개입은 불가능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도적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군에 대한 문민통제도 강화되어 왔다. 정무직인 국방부 장관과 현역 군인 중 최선임인 합참의장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국회 국정감사와 예산심사 를 통해 군의 행보를 민간 정치인들이 견제할 수 있는 수단도 갖춰졌다. 전역한 지 7년이 지난 군인만 국방부 장관이 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지만 군사정권 시절에 비하면 많은 발전을 이뤘다. 군 조직의 중추인 젊은 장교들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시민으로서 문민통제 원칙을 잘 알고 있다.

지난 8일 해군이 실시한 해상사격훈련에서 장병들이 미스트랄 대공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해군 제공
그럼에도 군에 대한 불신의 눈초리가 사라지지 않는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의 머릿속에 여전히 5.16과 12.12의 ‘악몽’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쿠데타는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일어났다. 5.16은 4.19 혁명 이후 집권한 장면 내각이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면서 일어났다. 12.12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어 발생한 권력공백을 신군부가 무력으로 차지하면서 일어났다. 비선실세 파문으로 주말마다 촛불집회가 열리고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현 상황도 정치적 혼란기다. 그래서 쿠데타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군의 정치적 중립 의지에 대한 불신도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발생한 국군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댓글사건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가던 ‘정치군인’이라는 단어를 되살렸다. 이 당시 사이버사령부가 작성한 댓글 수는 1만2800여건에 달했다. 군의 정치관여를 방지해야 할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장은 부대원들에게 조직적인 정치 관여를 지시했다. 북한과의 사이버전에 대응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국가기관이 특정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정치에 개입하는 행위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그럼에도 이를 막으려 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을 강행한 것처럼 국민여론 수렴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일방통행’식 정책을 추진하는 국방부의 행보와 윤일병 폭행사망사건 등 군 내 부조리가 근절되지 않는 점 등도 원인으로 꼽힌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집회에서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면서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제원기자
우리 군은 창군 시절부터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군은 문민통제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일부 예비역 장성들은 쿠데타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당시 군 수뇌부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군 통수권자로 받아들였다. 이같은 태도는 2000년대 이후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군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남아있다. 한 예비역 장교는 “12.12와 5.18을 겪은 세대가 완전히 퇴장해야 군을 불신하는 풍조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정치군인들이 남긴 상처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탄핵을 당해 권한마저 정지된 국가적 혼란 속에서 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임무수행도 중요하지만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다. 독일 통일을 이끌었던 동독의 민주화도 동독군이 정치적 혼란 수습을 공산당과 시민들에게 맡긴 채 묵묵히 임무수행에 전념했기에 가능했다. 지금 우리 군에 필요한 자세도 이와 같다. 탄핵 정국 속에서 군이 ‘의연한 침묵’을 유지한 채 대북 경계태세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계엄령이나 쿠데타라는 단어는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또다른 동력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