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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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환상이 깨지다'… 기로에 선 글로벌 여성정치인

유리천장 깬 여성 지도자들… 불통·무능·부패로 줄줄이 추락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중도 하차할 예정이고, 기대를 모았던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백악관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에 앞서 브라질 역사상 첫 여성 국가 지도자였던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지난 8월 회계장부 조작 스캔들로 인한 탄핵으로 쫓겨났다. 호주에서도 첫 여성 총리로 각광을 받았던 줄리아 길러드가 2013년에 물러났다. 박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선 후보의 좌절을 계기로 세계적인 추세로 자리를 잡아가던 여성 지도자의 대권 도전에 일단 제동이 걸렸다. 두 여성 지도자의 몰락으로 여성의 국가 또는 정부 수반 진출이 줄어들지 아니면 여성 정치인의 보다 과감한 대권 도전이 재개될지 주목된다. 세계 주요국 여성 지도자의 현주소를 긴급 점검해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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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 지도자의 자질론

박 대통령과 힐러리는 유리천장을 깼다. 박 대통령은 직선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유리천장을 무너뜨렸고, 힐러리는 미국 대선 사상 최초로 주요 정당 대선 후보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집권 이후 불통 인사와 무능력한 국정 운영으로 내리막길을 달려왔다. 박 대통령은 급기야 최순실 국정농단의 ‘몸통’으로 전락해 임기를 마치지 못하는 헌정사의 오점을 남기게 됐다. 힐러리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 그는 막말과 포퓰리즘 공약으로 미국 식자층이 외면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꺾지 못함으로써 글로벌 정가에서 여성 지도자의 한계가 드러난 것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미국 아메리칸대의 제니퍼 롤리스 교수는 “힐러리가 폭넓은 국정 경험을 쌓은 준비된 후보였으나 트럼프에 고배를 마심으로써 여성이 선출직에 약하다는 고정 관념이 더욱 굳어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롤리스 교수는 “여성이 장기간에 걸친 선거 유세전에서 체력적으로 남성 후보에 밀리고, 선거자금 모금이나 유권자 투표장 끌어내기 경쟁 등에서 고전하는 게 일반적이고, 힐러리가 그러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역(총리)은 ‘민주화의 꽃’으로 불렸다. 그는 그러나 집권 후에 국민 탄압과 불통의 화신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수치 자문역은 그가 경멸했던 군부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는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하고, 독단적인 의사 결정으로 ‘불통 지도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환상으로 끝난 여성 지도자의 부패 없는 정부

전통적으로 남성 지도자는 부패 네트워크에 얽혀있기 쉬우나 여성 지도자는 부패 스캔들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게 국제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통념이다. 모성애로 무장한 여성 지도자는 또한 따뜻한 소통의 리더십을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 수치 미얀마 국가자문역 등은 이런 기대감을 무참하게 허물어뜨렸다. 박 대통령 정권은 재벌을 등쳐 사리사욕을 채우던 군사정권의 구태를 그대로 재연했다. 호세프는 2014년 대선 당시에 국영은행 자금을 재정적자 감축에 전용한 회계 부정 혐의로 탄핵당했다. 다만 호세프의 개인 비리가 드러난 것은 없다. 힐러리는 남편 빌 클린턴과 함께 설립한 ‘클린턴재단’을 통해 거액의 자금을 모았다.

여성 지도자의 소통 능력도 도마 위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수첩 인사, 대면 보고 거부, 기자회견 회피로 이어진 불통 정치의 끝판왕으로 등극했다. 힐러리는 국무장관 재임 시 사설 이메일을 사용하고, 대선 유세기간 내내 기자 회견이나 간담회 등을 극구 회피했다. 수치 국가자문역도 2인자를 키우지 않고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예일대의 앤드리아 바이얼 교수는 “여성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절대 시인하지 않으려는 일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이얼 교수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해온 사회였기에 여성 지도자는 아직도 정통성이 약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 여성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잘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향한 공격에 과잉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재도약을 꿈꾸는 여성 대권 도전

힐러리 등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여성의 대권 도전 열풍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미국의 시사종합지 애틀랜틱이 최근 보도했다. 애틀랜틱은 “클린턴 후보가 유권자 총투표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보다 200만표 이상 더 많이 얻는 등 성공을 거둬 대권을 꿈꾸는 여성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지는 “힐러리의 대권 도전으로 정계 진출을 노리는 여성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노터데임 대학의 데이비드 캠벨 교수는 “여성은 다른 여성 선구자를 목격했을 때 그 모델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미국에서 젊은 여성의 정치 참여 및 정계 진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식이 개최되는 직후인 내년 1월 21일에 ‘여성 워싱턴 전진대회’가 열려 트럼프의 마초 정치 시대에 대항하는 여성 정치력 신장 운동의 막이 오를 예정이다.

◆건재하는 세계의 여성 지도자

클린턴의 낙마로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여성 지도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2)이다. 메르켈 총리는 6일(현지시간) 기독민주당 당수로 다시 선출됐고, 총리직 4연임 도전에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내년 9월 기민·기사당 연합의 단일 총리 후보로 출마한다. 메르켈 총리는 난민에 대한 국경 개방 등 난민 유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반유럽연합(EU)·반이민주의를 내세운 신생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 등이 정당 지지율 3위를 기록하는 등 기세를 올리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2005년부터 독일 총리로 재임하고 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60)는 지난 6월 23일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영국의 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가 결정된 이후에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영국 내무장관 출신으로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이후 26년 만에 영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됐다.

메이 총리는 1997년 영국 남동부 버크셔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2002년에는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의장에 올랐고, 2010년 보수당 정부 출범 이후 내무장관에 취임해 총리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최장수 내무장관 재임 기록을 세웠다.

니컬라 스터전(46)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도 국제 사회에서 강력한 여성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스터전은 약 2년 전에 스코틀랜드 분립독립 주민투표가 부결된 이후 자치정부 수반 자리에 올랐고, 영국의 브렉시트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EU 잔류 노선을 주도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베아타 시드워 총리(53)가 2015년 11월 이후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활약하고 있다.

남미에서는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했다. 그러나 칠레의 미첼 바첼레드 대통령(65)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고, 2014년에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아프리카에서는 이 지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엘런존슨 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78)이 재임하고 있다. 그는 201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에서는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전화 통화로 주가를 올린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60)이 올해 1월 총통 선거에서 당선돼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이 됐다. 미얀마의 최대 정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끌고 있는 수치(71) 국가자문역이 사실상의 국정 최고 책임자로 활약하고 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