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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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포스트잇으로 돌아본 한해

추모·위로·자기고백·좋은 세상을 위한 변화의지… 2016년에 새긴 시민의 메시지
지난 10월 29일부터 9주째 매주 주말마다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아빠의 목말을 탄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변화를 외치고 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들이 모여 사회를 바꾸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촛불집회처럼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표명이 됐던 사건들을 돌이켜보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행복한 곳에서 편히 쉬세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추모공간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 메시지 중 가장 많이 나왔던 내용들이다. 캘리그래피로 만든 미안함, 추모, 변화 의지의 말들을 수백장의 포스트잇 메시지와 함께 만들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당신과 함께 나도 죽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나는 너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메시지 중에서. 지난 5월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의 한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 23세 젊은 여성이 생면부지의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살해 동기로 “사회생활에서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에 만들어진 강남역 추모공간을 찾은 한 시민이 전시된 포스트잇 추모메시지를 보고 있다.
한 포스트잇에 ‘세상에 대한 혐오가 여성을 죽였다’며 여성에 대한 폭력과 포르노그라피에 저항하는 운동의 상징인 하얀 리본이 그려져 있다.
사건 발생 다음날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한 장의 추모 포스트잇이 붙었다. 한 장의 포스트잇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강남역을 비롯한 전국 9개의 지역의 추모 현장에서 총 3만5350개의 포스트잇이 붙여졌다. 고인에 대한 명복을 비는 내용이 가장 많았고 ‘좋은 세상 만들겠다’, ‘미안합니다’ 등이 있었다.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에 만들어진 강남역 추모공간에 전국 9개 지역에서 가져온 추모메시지 일부가 전시돼 있다.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추모공간에 놓여 있는 추모 인형.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추모현장 뒤에는 ‘총대’들이 있었다. ‘총대’란 포스트잇을 붙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철수까지 도맡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총대를 메다’에서 따온 말이다. 이렇게 지킨 추모 포스트잇은 현재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서 내용과 주제별로 분류해 기록·보관하고 있다.

시민들이 적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추모 포스트잇 메시지다.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다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비정규직 청년을 작은 꽃에 비유한 내용이다. 아직 꿈과 희망을 펼치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사회적 제도 개선의 의지를 표현했다.
‘청춘이 행복한 나라, 노동자가 웃는 나라, 약자가 배려받는 나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추모메시지 중에서. 지난 5월 28일 서울메트로 스크린도어 관리 외주업체 직원으로 일하던 19세 김모씨가 스크린도어 오작동 신고를 받고 홀로 점검에 나섰다가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망 당시 소지품이 정비도구와 컵라면 한 개뿐이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고 이후 구의역에는 추모공간이 마련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고인의 넋을 달래고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1만1000여장의 추모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스크랩하고 내용들을 기록해 관리하고 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저항과 평화의 의미로 시위행렬을 가로막은 경찰차벽에 무료로 나눠준 꽃 스티커를 붙여 꽃벽으로 바꿨다. 이 스티커는 촛불 모양이 0416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의지를 보여준다.
성탄 전야에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9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동상에 붙은 대자보 형식의 메시지. 내가 광화문에 있는 이유라는 이 메시지는 9주째 주말마다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지속적으로 참가한 시민이 쓴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은 자신의 의지로 현장을 방문해 추모나 위로, 자기 고백,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변화 의지 등을 포스트잇에 담았다. 시민 한명 한명이 주최자이자 참여자이고 매개자의 역할을 했다. 새로운 형식의 포스트잇 민주주의다. 메시지들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과 사고의 아픔을 치유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되고 데이터화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기억될 수 없고 기억하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다.

사진·글=남정탁 기자 jungtak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