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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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가뜩이나 힘든데 AI까지… "특수는커녕 버티기도 어려워"

송년 시즌 시름 깊어지는 전통시장·식당가
새해를 나흘 앞둔 28일 서울 영등포전통시장은 하루 종일 한산했다. 채소 노점상인 박모(66·여)씨는 “원래 연말은 송년회가 몰려 식당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편인데 올해는 청탁금지법(김영란법) 때문인지 연말 특수가 사라졌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 생선가게 주인이 안 보이는 이유를 묻자 박씨는 “손님이 뜸하니 나에게 가게 좀 봐 달라면서 다른 일을 하러 갔다”고 말했다.

서대문구 영천시장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 10명 중 7∼8명은 장 보러 나온 게 아니라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 보행자들이었다.

생선을 파는 안용국(57)씨는 “매출이 지난해의 70~80% 수준”이라며 “소비가 너무 위축돼 앞으로도 상황이 더 좋아질 것 같지 않다”고 걱정했다.

소비 심리에 민감한 영세 상인과 자영업자 등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경기 침체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조류인플루엔자(AI) 등으로 연말 특수가 사라져 서민들이 아우성이다. 매년 연말연시면 북적거리던 서울 영등포전통시장이 28일 물건을 사러온 사람이 없어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경기 불황이 길어지는데다 청탁금지법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영향으로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 속에 중국인 관광객까지 눈에 띄게 줄면서 ‘연말 특수’마저 실종됐기 때문이다.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영등포전통시장에서 부침개와 전을 파는 안모(48·여)씨는 “개업식이나 송년회 같은 대량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다”며 “더군다나 AI가 터져서 달걀 값이 크게 뛰었는데 음식 가격을 갑자기 올릴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토로했다.

강동구청 인근에서 7년째 한식집을 운영하는 한 여주인은 “단골들이 있어 아직은 버틸 만하지만 주변에서는 외환위기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며 “나라가 어지러우니 사람들이 밖에 나와 돈을 안 쓴다”고 했다. 요즘에는 구청 공무원들도 대부분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실정이다.

인력시장도 얼어붙었다.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열리는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사거리는 일자리를 찾는 일용직 건설노동자가 수백명씩 몰리지만 일감을 받는 데 성공한 사람은 절반 정도에 그쳤다.

인력개발회사 관계자는 “겨울철은 다른 때보다 일감이 줄긴 하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오랫동안 건설 현장에서 일한 중국인 마모(67)씨는 “일주일에 사나흘 일하면 정말 다행”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전문가들은 소비·투자 심리가 모두 위축된 환경 탓이 크다고 진단한다.

고려대 이만우 교수(경영학)는 “청탁금지법이 애매하다 보니 사람들이 법에 저촉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며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 여파로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기피하는 것도 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하반기부터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서울 명동과 동대문 일대, 관광업계 등 중국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상권은 매출 급락으로 아우성이다.

이 때문에 내수를 살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숙명여대 신세돈 교수(경제학)는 “수출이 2년 연속 하락세인 데다 소비와 투자 모두 부진해 내수도 좋지 않다”며 “이런 식으로 가면 성장률 2%는커녕 1%도 달성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정부가) 돈을 무작정 쏟아부을 게 아니라 청년이나 극빈자 등을 대상으로 돈을 풀어 저소득층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진영·남혜정·권지현·배민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