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지음/한티재/1만5000원 |
“현실에서는 지금도 국가권력에 의한 개인의 의사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광범위한 개입과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춰보면, 필화는 ‘박제된 과거’나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권력이 늘 그러했던 것을 몰랐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이 저자의 이런 주장에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언론 탄압이며, 풍문으로 떠돌던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밝혀졌다. 통치자들은 국가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불온한 영역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문예가들은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불순세력’ 혹은 ‘외부세력’이었다. 책은 “국가권력에 의해 ‘목 잘린’ 일곱 편의 문학작품”을 다룬다. 자유로운 상상과 사고를 억압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인 법률이 어떻게 작동했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무엇인지에 천착하고 있다.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가 실린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의 본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검찰은 ‘분지’를 반미·용공작품으로 몰아세웠고, 법원은 같은 취지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제목, 줄거리, 표현 등이 반미·반정부적 감정과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요소가 다분하다”고 판단했고, “분단 상황에서…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판단의 근거였던 반공법은 1980년 국가보안법으로 흡수되었고, 여전히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은 찬양, 고무 등에 관한 내용을 유지하고 있다.
작가 장정일(가운데)과 마광수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왼쪽)’, ‘즐거운 사라(오른쪽)’가 음란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필화사건을 겪었다. 자유로운 상상과 그것의 표현을 억압하는 권력의 횡포는 지금도 여전하다. |
책은 ‘분지’와 ‘내게 거짓말을 해봐’ 외에 ‘용공이적’ 혐의 혹은 음란성 시비로 재판을 받은 김지하의 ‘오적’, 양성우의 ‘노예수첩’, 이산하의 ‘한라산’, 염재만의 ‘반노’,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를 다루며 법률의 시각으로만이 아니라 문학 내지 인문학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이산하의 ‘한라산’ 사건은 지금까지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재판기록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에서 책의 성과로 꼽을 만하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껏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조차 억압했던 권력의 야만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심각한 부작용을 실감하게 된다.
저자는 필화를 겪은 뒤 남정현의 창작 활동이 “급격하게 위축되고, 작품의 수준도 예전 같지 않아 문단과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를 변호했던 한승헌은 “그런 불행이 없었더라면 한 시대의 촉망을 받은 ‘남정현 문학’의 완성에 이를 만한 값진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토로했다. 장정일 사건에 대해 마광수는 “자기 검열이 많아지고 상상력이 위축되는 등 작가에게 치명적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작가에게 사법적인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유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해도 전혀 기쁘지 않았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히고, 사건 이후에도 예리한 문제제기를 이어갔던 장정일의 태도는 예외적인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책머리에 ‘왜 다시 필화인가’라는 제목을 붙여 쓴 글은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직면한 우리가 되뇌어 보아야 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꿈꾸는 자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우리가 꿈꾼 것을 표현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여전히 이 행복을 알고나 있느냐고.”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