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은 전통적으로 채집과 기술(description), 분류의 학문이었으나 분자수준의 측정을 통해 현상의 기원을 추구하는 현대의 생명과학은 점차 내재된 질서를 파악하는 데 접근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물리적 현상과 달리 여러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비로소 발현되는 특징을 지닌 생명현상은 이렇듯 단일 인자를 규명하는 환원주의적 접근으로는 숨겨진 질서를 파악해낼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복잡계 과학에서는 생명이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는 진화적 특성을 가진 것임을 점차 밝혀내고 있다.
조광현 KAIST 교수·바이오및뇌공학 |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확립된 성과를 거둔 제어공학은 새로운 진화를 시작하고 있다.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생명현상의 제어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러한 시도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동적 계획법을 고안해 최적 제어기술을 개발하고 현대 제어공학에 수많은 업적을 남긴 리처드 벨만은 생애 마지막에 생물학이야말로 궁극의 과학이라 생각하고 제어공학을 생물학 연구에 응용하는 시도를 했으나 당시로선 이러한 시도를 추구하기엔 정량적 실험이 제한적이어서 이론연구에 그치고 말았다. 보다 최근에는 현대 제어이론의 대가인 존 도일, 히데노리 기무라, 리처드 머레이 등이 관련된 시도를 다시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2011년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 한 편은 이와 같은 시도를 본격화하는 기폭제가 됐다. 이 논문은 통계역학의 대가인 앨버트 바라바시와 비선형 제어공학의 대가인 자쿠스 슬로틴이 생명체의 분자네트워크를 포함한 일반적인 복잡계 네트워크의 구조적 특징으로부터 네트워크의 상태를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제어타깃을 간단한 수학적 알고리즘을 통해 찾아낼 수 있음을 보인 연구인데, 발표 이후 매년 100회 이상의 인용을 거듭하며 제어공학 분야에 복잡한 생체 분자네트워크의 제어라는 새로운 도전을 부추기고 있다. 이는 생명과학이 추구하는 바가 원리의 이해를 뛰어넘어 결국 생명현상을 제어하는 것임을 간파한 결과이다.
궁극의 과학인 생명과학과 궁극의 공학인 제어공학의 만남은 어쩌면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혼돈의 모습으로 비치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지배하는 내재된 질서를 찾아내고 이를 제어해 원하는 방향의 생명현상을 유도하는 이 만남은 신약개발과 환자맞춤형 치료, 항노화 물질 발굴 등 여러 방면에서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바이오산업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재편할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조광현 KAIST 교수·바이오및뇌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