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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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세이] 새해에도 한강은 흐른다

출근길에 나섰다. 차가 아래쪽에 둥근 모양의 예쁜 아치터널을 가진 두무개길에 들어섰다. 오늘도 한강은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 저편, 도시의 건물이 밤샘추위에 웅크린 거대한 로봇군단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동지를 한 절기나 지나면서 새롭게 기운을 회복한 채 붉게 떠오른 태양을 뒤로하며 그 윤곽을 뚜렷이 해가고 있다. 한강의 잔잔한 물결은 아침햇살을 받아 홍조로 반짝거렸다.

조정래 소설 ‘한강’의 호남평야 소작인이던 천두만은 추운 겨울 새벽에 상경해 옥수동에서 첫 거처를 잡았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이었다. 벌거숭이 야산에 천막 쪼가리로 지붕 덮어 마련한 움막집에서 동대문시장과 중부시장으로 다니면서 지게품을 팔았다. 그가 판잣집과 움막집으로 가득 찬 이 산동네에 사는 유일한 맛은 아침마다 한강을 한눈에 바라보는 것이었다.

서명교 대한건설정책연구원장
그로부터 40년이 채 안 된 1997년, 외환위기 바로 직전 영국에서 돌아온 나 또한 이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한남동으로 걸친 야산의 끝자락을 파 재개발로 건설된 아파트였다. 서울로 올라와 마포대교 밑 하얀 모래사장을 맨발로 밟아 본 지 꼭 20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영국에서는 제3의 길을 내세운 토니 블레어가 총리로 당선됐다.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함께 20년 가까이 시장자유주의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던 대처리즘은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냉전 붕괴로 사회주의 이념의 비현실성을 자각한 노동당은 보수와 진보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고, 영국은 그들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중도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일을 좀 보려면 좁고 꾸불한 오르막길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골목을 두고 작은 점포와 낡은 주택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한강 보이는 옥탑방은 영화나 드라마의 무대가 됐다. 어쩌면 살짝 다듬어 예술을 담으면 서울의 몽마르트언덕이 될 만했다. 옥수역 근처에 옹기종기 자리한 포장마차는 외환위기에 지친 이들의 푸념을 달래주었다. 나 역시 늦은 시간, 가끔 포장마차에 들러 떡볶이, 순대, 튀김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산등성이 위쪽으로도 한 구역 한 구역 재개발이 진행됐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틈새 찾기 힘든 겹겹한 아파트 병풍으로 변했다. 그동안 팔당댐 아래에서 한강을 서로 건너는 다리는 32개로 늘어났다. 보수와 진보로 나눠진 대통령들도 그 사이 함께했다.

태백과 금강산에서 시작해 흘러온 한강물은 옥수동에 이르러 중랑천 물과 합쳐진다. 두 물이 합쳐진다는 뜻으로 두무포라 지은 이곳은 마포가 서호라면 동호였다. 이 나루터에서 강원과 경상의 세곡선이 모였고, 세종이 대마도를 정벌하러 가는 이종무 장군을 환송했다. 장안의 시인 묵객들은 한남, 응봉으로 이어져 한강 절경 중의 절경으로 이곳을 즐겨 찾았다. 정사에 지친 선비들이 옥정수골의 독서당에서 심신을 충전했고, 강가의 야산은 정월대보름과 추석에 달맞이 명소가 됐다. 유유히 갈매기 벗 삼아 세월 즐긴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은 한강 맞은편 옥수동과 응봉산의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흐른다. 옛 물을 보내며 새로운 물로 흐른다. 한강물은 인걸도, 사회의 가치도, 도시의 모습도 새로이 하며 유유히 흘렀다. 소리 없는 우리의 삶과 같이 흘렀다. 기쁨도 고통도 함께하며 우리의 삶은 역사를 만들어갔다. 톨스토이는 소설 ‘전쟁과 평화’를 통해 행복은 고통 가운데서도 삶을 사랑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차가 막히던 강변북로를 빠져 나와 한결 숨통 트인 속도로 한강대교를 건넌다. 어느덧 한강의 물빛도 서서히 홍조를 걷어내며 본래의 푸른빛으로 변하고 있다.

서명교 대한건설정책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