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둔 지난달 마지막 주말 오전 서울 용산역사 내의 한 카페.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던 박인혜 튜터(강사)는 기자가 경직된 어깨로 연필을 꽉 쥔 채 하얀 스케치북 위에서 머뭇거리자 “긴장을 풀라”고 조언했다.
이날 수업에 참석한 수강생 4명은 재능공유 플랫폼인 ‘탈잉’을 통해 ‘일일 드로잉 수업’을 신청한 이들이었다. ‘탈출 잉여’의 줄임말인 탈잉은 ‘남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각자의 재능을 공유하며 삶을 풍요롭게 하자’는 기치 아래 만들어진 온라인 재능공유 플랫폼 서비스다. 특정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이가 온라인에 수업을 개설하면 수강 희망자들이 신청을 해 강의가 이뤄지는 시스템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역의 한 카페에서 미술수업 수강생들이 완성된 그림을 들고 뿌듯해하고 있다. 재능공유 플랫폼 탈잉 제공 |
3시간짜리 수업이지만 꽤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일단 그림 그리기에 익숙해지는 1단계로 선 긋기 연습을 한 뒤, 2단계로 맥주나 콜라 캔을 묘사하면서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을 숙지했다. 이어 참가자 본인이 염두에 둔 그림을 그렸고, 긴장감 속에 저마다 그럴 듯한 멋진 스케치를 완성한 ‘미술 초보’들은 환한 웃음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나누는 즐거움에 가치를 더하다
미술교육과 대학원생인 박 튜터는 “미술 입시에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제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가 재미없는 일이 됐다”며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즐거운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술은 얼마든지 학원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스킬보다는 튀어나오거나 약간 투박한 선 하나도 그림의 한 부분이고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그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데 집중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탈잉에 수업을 개설한 사람들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서 느끼는 희열과 보람, 자신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재능 품앗이’의 열매라고 입을 모았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장지영(27·여)씨는 탈잉에서 헬스를 지도한다. 전공과 무관하게 8년간 다진 운동으로 자격증을 따고 관련 대회에서 수상을 하게 되자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장씨는 “그저 좋아서 시작한 취미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또 저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도 자극을 받는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에 근무하는 주재학(29)씨도 전공은 행정학이지만 말하기와 발표 능력을 키워주는 수업을 진행 중이다. 주씨는 “대학 방송국 경험과 아나운서 학원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후배 몇 명을 지도했는데 면접이나 발표 준비가 필요한 사람이 의외로 많더라”며 “공기업 최종 면접을 도와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날아갈 듯 기뻤다”고 활짝 웃었다.
사실 이 서비스는 회사 대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아이디어다. 2015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생이던 김윤환(29) 탈잉 대표는 헬스로 다이어트에 성공하면서 헬스 단체를 만들 만큼 ‘준전문가’가 됐다. 김 대표는 “주변 친구 몇몇에게 제 운동과 식단관리 노하우를 알려주다가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생각 외로 반응이 뜨거웠다”며 “주식과 댄스, 어학 등 각 분야에 재능을 가진 친구들에게도 수업을 만들도록 했더니 100건 넘는 요청이 쇄도해 ‘재능이 가치가 되는 사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전문가들은 재능공유 플랫폼이 우리에게 내재된 ‘인정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최승원 덕성여대 교수(심리학)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성취감과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가에 민감하다”며 “재능공유 플랫폼도 이런 기본적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승우 동국대 교수(소비자마케팅) 역시 “사람은 누구나 나눔의 욕구가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한다”고 말했다.
드로잉 수업 참가자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들인데도 그림이 완성돼 갈 즈음 서로 친근하게 느껴졌다. 업무 스트레스로 지끈거리던 머리도 그림에 빠져 대화하고 웃다보니 맑아지는 것 같았다. 메마른 일상에 단비와 같은 에너지를 얻은 셈이다.
다만 비용은 부담스러웠다. 수업 내용이 알찼지만 3시간에 3만원이어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이 계속 수강하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다른 수업도 시간당 만 오천원에서 3만원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탈잉 관계자는 “수강료의 적정선을 제시하지만 튜터가 책정을 하다 보니 비싸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고 말했다. 튜터의 수준을 어떻게 가늠할지도 숙제다.
검증 전담 직원이 능력 증빙 서류를 확인하는 정량적 평가와 성실성 등을 판단하는 정성적 평가 기준에 따라 꼼꼼히 체크하지만, 실제 수업을 보기 전에는 한계가 있다. 아울러 부업으로 강의하는 튜터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강의가 돌연 중단되는 사태도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남혜정·김지현 기자 hjna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