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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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세이] 어느 행복한 은퇴 이야기

아는 선배가 시집을 보내 주었다. 자신의 시집이었다. 시를 쓰는 분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시집을 냈다니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바로 근처에 산다고 했다. 약속을 잡고 그를 만났다. 우리는 생맥주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이야기꽃이 피었고 최근 들어 웃을 일이 별로 없었던 나는 선배 덕분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선배는 대학시절 건축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취직해 리비아의 건설현장을 누볐다. 귀국한 후 건설회사에서 30여 년을 일하고 남들처럼 60세에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산에도 오르고 친구들도 만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곧 시들해졌다. 이렇게 소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대학에서 일반인들을 위한 문학 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한 번 가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강좌에 참석했다. 대학 다닐 때는 소설도 읽고 시도 좋아했지만 치열한 사회생활의 격랑에서 문학이나 시를 생각하며 살 겨를은 없었다. 그렇지만 강좌에 출석하는 회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도교수의 칭찬과 격려도 한몫했다. 그는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제대로 시를 써볼까 하고 생각했다.

윤철호 선문대 교수·산업경영공학
시를 쓰자면 우선 시어를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학도답게 무슨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성이었다. 선배는 마음에 와 닿는 시를 찾아서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한 권 한 권 시집을 사서 마치 공부하듯이 탐독했다. 그렇게 읽은 것이 벌써 1000권이 넘는다고 했다. 말이 쉽지 1000권이라니.

동호인들도 생겼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 읽은 시들을 소개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 무명 시절 옥스퍼드대학에서 ‘잉클링스’라는 모임을 결성해 북유럽의 신화, 요정, 마법사, 구식 무기 등을 논하며 상상력과 실력을 키워갔듯이 그는 동호회 모임을 통해 시 쓰기를 위한 기초를 쌓아 나갔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완성된 시를 모아 동네 지하철 광장에서 회원들과 함께 시화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즐겁게 작품들을 감상했다.

시를 쓰면서부터 그의 일상이 바뀌었다.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주위 풍경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소소한 사물, 생명체, 일상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기억 속에 녹아들며 새로운 시어로 탄생했다. “시를 쓰면서 내 스스로가 달라졌다. 매일의 시간이 그렇게 소중하다. 인생 2막이 충만해졌다. 꿈이 생겼다. 더 좋은 시를 쓰고 싶다.” 이제 70세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새로운 꿈과 열정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부러웠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시를 쓰고 싶어졌다.

대개가 은퇴 이후의 삶이 팍팍하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는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단다. 게다가 노인빈곤율도 높다고 한다. 삶이 팍팍해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걱정만으로 지새울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좀 더 행복한 노후를 보낼 자격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키웠다. 직장에서는 밤늦도록 일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은퇴 이후에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만큼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 꼭 시가 아니면 어떤가. 살아오면서 그동안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해 이제부터라도 한걸음씩 내디뎠으면 한다. 그렇게 꿈을 가꾸며 부푼 가슴으로 하루하루 행복했으면 한다.

윤철호 선문대 교수·산업경영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