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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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해병정신

진해만 바람이 유독 차게 느껴졌다.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장정들. 누구에게도 꿀리고 싶지 않아 해병대를 지원했을 터. 돌도 씹어삼킬 한창 때였지만 훈련소 선임병들은 가혹했다. 사흘 동안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많이 봤다. 군홧발로 지원병의 머리를 밟아 짓이기는 장면은 생생하다. 해병대는 IQ시험을 밖에서 보고 훈련소에 입소해 신체검사를 받았다. 나는 꼭 빨간명찰을 달고 팔각모를 쓰고 싶어 병무청 담당자에게 담배 1보루를 갖다바쳤다. 그럼에도 훈련소 신검에서 탈락했다. 사고 칠 위험인물이라며 ‘고향 앞으로’라고 명령했다. 아무나 해병이 되지 못한다. 30여년 전에도 그랬다.

TV프로그램 ‘진짜사나이’가 인기있을 때였다. 방송사 측에서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을 통해 해병대 사령관에게 압력을 넣었다. 육해공군을 다 했으니 해병대 촬영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영주 사령관이 일갈했다. “쇼는 안 된다, 하려면 리얼로 해야 한다.” 조건도 내걸었다. 출연자들이 머리를 깎고 천자봉 행군을 해야 한다고. 6주 해병교육 가운데 5주차에 천자봉 행군을 한다. 포항 운제산 대왕암을 오르는 코스다. 숨을 몰아쉬는 지점에 입간판이 서 있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병대의 ‘악기바리’가 엊그제 네이버 실검 1위를 차지했다. 악기바리는 싫다는 음식을 강제로 꾸역꾸역 먹이는 병영악습. 피해자 증언이 섬뜩하다. “메뚜기, 지렁이, 개구리, 바퀴벌레를 ‘씹어’ 한 뒤 씹으면 ‘삼켜’ 한다. 바퀴벌레를 뱉으면 폭행이 시작된다.” 이번엔 “이틀 동안 초코바 180개를 먹었으며 몸무게 61㎏이 81㎏까지 쪘다”는 진술이 나왔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은 왜 생긴 걸까. ‘노력정당화 효과’이론이 있다. 혹독한 지옥훈련의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의 엘리트 의식, 아무나 못 가는 곳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으로 설명된다. 빨간명찰을 달고 팔각모를 쓰는 해병정신의 핵심은 명예다. 이 시대에 먹는 것 갖고 고문하다니, 결코 해병의 길이 아니다. 이런 개병대 정신으로 어찌 귀신을 잡을 것인가.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