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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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법조타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했거늘…

문화인 블랙리스트 너무 치졸… 대통령 지지하지 않는 사람엔 보복보다는 소통과 설득 필요 / 국민을 괴롭히는 권력은 불행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없이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고 가정해 보자. 가을이 무르익은 10월 둘째주 목요일 저녁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문학상 심사결과를 발표한다. 2005년부터 거의 매년 후보에 오른 한국의 고은 시인이 수상자라고 치자.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어떻게 했을까.

‘축하성명을 내야 한다’는 건의에도 박 대통령은 뾰로통하기만 하다. 고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작시 ‘만인보’ 때문이다. “일본 육군의 모범장교였다가/ 육군 소장이었다가/ 쿠데타 이래// 녹슨 쇳소리/ 그의 목소리의 파쇼는 바윗덩어리였다.” 만인보의 박정희 전 대통령 편을 떠올린 박 대통령의 양볼에 살짝 노기가 서린다. 충직한 부하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괜히 만들었을 리 없다.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인데 청와대만 침묵을 지킨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거듭 말하지만 가정과 상상일 뿐이다. 지난해 박 대통령이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 작가에게 축전을 보내 달라는 문화체육관광부 제안을 묵살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문득 든 생각이다. 한강도 고은처럼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를 썼다는 게 이유란다.

블랙리스트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외래어다. 원래는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들의 명단’이란 무시무시한 뜻이다. 그래서인지 박영수 특별검사는 블랙리스트 대신 ‘지원배제명단’이라고 완화해 부른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집행하는 각종 문화예술 지원금 배정에서 제외할 사람들의 목록이란 의미다. 특검도 고은이나 한강이 설마 ‘감시’까지 당했다고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을 터이다.

수사기관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렇더라도 범죄를 예방할 목적에 한정해야 한다. 1989년 옛 서울지검 동부지청 검사들이 이웃인 서울지법 동부지원 판사들을 대상으로 작성해 돌려보던 리스트가 외부로 유출돼 곤욕을 치렀다. 동부지원 전체 법관 28명 중 구속영장 기각률이 가장 높은 6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검사들은 명단에 있는 판사가 당직을 서는 날이면 영장 청구를 뒤로 미루곤 했다.

언론 보도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동부지원 판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청장이 지원장을 만나 백배사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긴 했지만 사회적 충격은 쉬 가시지 않았다. 법조계 원로들은 검찰을 향해 “법원을 으르고 겁주려는 검은 수법이며 명백히 직무범위를 일탈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 막강한 검사도 때로 리스트의 피해자가 된다. 지난해 박영수 변호사와 나란히 특검 후보로 추천된 조승식 변호사는 검사 생활 대부분을 조폭 잡는 강력부에서 보내며 깡패들로부터 ‘천하의 악질 검사’란 별칭을 얻었다. 그런데 조폭과 가까운 일부 정치인도 그를 고깝게 여긴 모양이다.

검사를 그만두고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1997년 친한 선배인 검찰 고위인사로부터 ‘서울지검 강력부장 꿈 접어라. 그쪽(여권)의 블랙리스트에 네 이름이 있다더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강력통’ 조승식의 이력서에 서울지검 강력부장만 쏙 빠진 것을 보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싶다.

누구나 싫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속으로 마뜩잖게 여기는 것과 1만명에 가까운 명단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한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일부가 아닌 전체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직자는 공평무사가 생명이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않았나. 떡을 더 주진 못할망정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할 떡까지 빼앗다니, 치졸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누가 권좌에 오르든 블랙리스트 사건의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현직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은 결코 섬멸해야 할 ‘적’이 아니다. 더 설득하고 소통해야 할 국민이다. 명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최근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미국 새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게 던진 말이 의미심장하다. “권력자가 자신의 힘을 다른 이를 괴롭히는 데 사용하면 우리는 모두 패배한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