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 관료들도 적는 게 숙명이었다.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들은 회의 때마다 열심히 받아적었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이다.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소통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한 게 있을까. 수석과 장관들이 살아남으려고 적은 메모는 이제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되고 있다. 청와대 김영한 전 민정수석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수첩이 그것이다. 헌재 탄핵심판과 특검팀 수사에 유용한 증거로 쓰이고 있으니 ‘메모의 배신’이라고 할 만하다.
‘적자’가 정말 살리기도 한다. 얼마 전 세계일보와 인터뷰한 김광수(59) 전 금융정보분석원장. 2011년 잘나가던 경제관료에서 피의자로 전락했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으로 280일을 감옥에서 보낸 그를 구한 건 단골 카페 여주인의 적는 습관이었다. 여주인은 손님이 어느 테이블에 앉아 무슨 주문을 했고 계산을 어떻게 했는지를 일일이 다 적어뒀다. 그 기록으로 검찰이 돈을 받았다고 밝힌 날에 이 카페에서 후배들과 술을 마셨음을 입증해 무죄를 받아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돈 23만달러 수수 의혹을 반박하기 위해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반 전 총장이 2005년 5월 외교부 장관 공관에서 돈을 받았다는 날의 기록이다. 박 전 회장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나오고 이름도 비어 있다. 반 전 총장 측은 “23만달러를 준 사람을 이렇게 혹평하는 게 상식에 맞느냐”는 논리다. 일각에서는 일기장이 수수 의혹을 덮는 반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쨌든 일기든, 수첩이든 적는 습관은 미덕이다. 제 잘못이 없다면 배신당할 일이 있을까.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