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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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박근혜·김기춘·조윤선

지난해 10월 시작해 벌써 13번을 기록한 주말 촛불집회를 기념하기 위한 독특한 시집이 나왔다. 박근혜정부의 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시인들의 작품이 대거 수록된 점이 눈길을 끈다.

28일 문단에 따르면 시집 ‘천만 촛불 바다’(실천문학사)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한 고은·신경림 등 시인 61명이 직접 촛불을 들고 서울 도심을 행진하며 국민주권이 농락당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쓴 시 한 편씩을 보탰다.

“백한 살 할머니도/ 늙은 아들 손잡고 나오셨네// 다 나왔네/ 다 나오셨네/ 혹에 나오지 못하였거든/ 집집마다 뜻을 걸고/ 일터에도 막을 걸었네.” (고은, ‘다 나오셨네’ 중에서)

“아빠의 어깨 위에 무등을 탄 다섯 살배기/ 희망이가 움켜쥔 촛불을/ 유모차를 타고 엄마의 촛불을 따라나선/ 저 아기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탄핵, 하야라고 당당히 외치는/ 5학년 초등학생의 카랑한 목소리를.” (문창길 ‘광화문 촛불’ 중에서)

광화문을 가득 채운 외침 가운데 유독 많았던 것이 ‘이게 나라냐’는 자괴감 섞인 탄식이었다. 이를 의식한 듯 박노해 시인은 ‘이게 나라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정의 실현과 공정 확보가 나라다운 나라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눈보라도 겨울바람도/ 우리들 분노와 슬픔으로 타오르는/ 마음속의 촛불은 끄지 못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춰서지 않는다// 나라를 구출하자/ 정의를 지켜내자/ 공정을 쟁취하자/ 희망을 살려내자.” (박노해, ‘이게 나라다’ 중에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풍자와 조소도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4월16일의 그 ‘세월호 7시간’ 동안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댜는 박 대통령을 한심하게 여기는 민심을 시에 담았다.

“대면 보고가 필요 있나요? 생글거리며 필러 정성껏 주입하는 그깟, 불편하면 거울 속 배경을 딜리트하는 얼굴 하나 달랑 들고 희한하게 기억도 깨끗하게 지우는 공주님 (…) 그나저나 공주니까 배고프면 밥은 챙겨야지, 찬 바다 먼 아이들의 죽어서도 우는 울음 들리건 말건 싹싹 밥그릇 비우는 그깟, 7시간” (손현숙,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 중에서)

시집 맨 뒤에는 촛불집회 일지와 함께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 중 확인 가능한 6367명의 명단이 수록됐다.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따르면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문화예술인은 9400여명으로 무려 1만명에 육박한다.

특검팀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51)·김종덕(59)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관주(53) 전 문체부 1차관, 신동철(56)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등 5명을 구속했다. 이번에 시집을 판매하고 남은 수익금 일부는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세월호 참사 추모사업과 문화예술인 권리증진 사업에 쓰인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