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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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중국인, 신분상승·생계 위해 입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첸줘씨 ‘중국군 동원 유형·구성에 관한 연구’ 논문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중국군은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10월18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이후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의 수는 240만명에 달한다. 중국군이 참전한 후 한국전쟁의 양상은 국제전으로 바뀌었다.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었다.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고, 가족과 나라를 보호한다’는 뜻으로,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지원해 자본주의의 침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참전의 명분으로 사상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군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개인적 영달과 생계유지가 참전의 원인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950년 10월 평안북도 구장군에서 붙잡힌 중국군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첸줘씨는 ‘정신문화연구’에 실린 논문 ‘한국전쟁 시기 중국군의 참전과 동원 유형 및 구성에 관한 연구’에서 중국 군인들의 참전 동기는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계산이 있었다고 밝혔다.

첸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초기에는 중국정부가 참전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지 1년이 안 돼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지도부에서 출병을 주장한 자가 1.5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입장이 달라진 것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부터다. 한·미연합군의 공세로 북한이 수세에 몰리자, 중국 지도부는 참전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국 내에서의 중국군 동원작업은 반혁명분자진압운동과 토지개혁운동 등 전국적인 정치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진행됐다. 첸씨는 중국 내에서 대중운동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1951년 3월2일 강원도 횡성에서 미 해병 1사단이 중국군 포로를 붙잡은 모습.
주한미군 제공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중국군 내부에서 동원된 경우와 민간무장조직 출신, 지방정부가 징병한 경우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국민당원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70%에 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까지 공산당과 치열하게 싸워왔던 국민당에게 한국전쟁은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참전이 기회인 것은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무장조직 출신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정부에 의해 징병된 군인 대부분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의식주를 보장받으려는 경우가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방정부는 참전한 군인 가족들의 생계를 정부가 책임지고, 군인이 사망할 경우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1951년 12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왕월송은 자신이 참전하게 된 동기에 대해 “우리 집은 형제가 세명이었는데 사는 집조차 없었다”며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 나는 부모님이 말려도 지원했다”고 전했다. 
6·25 당시 중국군들이 사로잡은 국군포로들을 이송하는 모습.
눈빛출판사 제공
첸씨는 “1952년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겨우 54달러에 불과했는데, 그해 일반 병사에게 지급된 연간 보조금이 116.9달러였다”면서 “당시 대부분의 중국군은 본인이 받은 보조금에 만족했다”고 말했다.
 
중국군 가운데 부농이나 지주 출신도 있었다. 첸씨는 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을 경우 반혁명분자가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입대신청서를 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참전을 통해 계급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덧붙인다.

첸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은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다르고 공산당에 대한 인식도 다양했다”면서 “이 군대를 ‘중공군’이나 ‘중국인민지원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고, ‘중국군’이라는 호칭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