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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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청와대의 봄

1623년 3월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강화도로 위리안치됐다. 위리안치란 집 주변을 날카로운 가시가 난 탱자나무 덤불로 울타리를 쳐 바깥세상과 접촉을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며느리와 아들은 그해 여름이 가기 전 차례로 숨지고 가을에 부인도 곁을 떠났다. 유배지를 감시한 별장의 기록이 생생하다. “광해는 머리 손질 한 번 하지 않고 옷도 벗지 않은 채, 삼시 끼니를 물에 만 밥 한두 숟갈 뜨는 데 그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8년 백담사로 유배된 뒤 천수심경을 달달 외웠다. “아무리 추울 때도 108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당시 주지스님이 말한다. 복수심이 작용했든 장수 DNA를 타고났든 보통사람과는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또다르다. 재직 시 탄핵심판 동안 63일간 청와대 관저에서 칩거한 데 이어 퇴직 후 검찰수사로 봉하마을서 두문불출 끝에 이승을 달리했다.

이 같은 사례는 권력을 놓든 뺏기든 그 상실감이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눈빛 한 번 말 한마디에 잘 돌아가던 세상이 어느날 갑자기 멈춰섰으니 단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9일 이후 청와대 관저에서 칩거 중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기 위해 지난 설을 앞두고 관저의 인수(仁壽)문을 나서 국립현충원을 다녀온 게 유일한 외출이다. 헌재가 그제 최종변론을 마치고 어제부터 평의에 들어갔다. 어떤 결정이 나든 이정미 재판관이 퇴임하는 13일 이전엔 박 대통령의 운명은 갈림길에 설 것이다. 선고일정이 짧게는 10일가량 남았다. 절대고독 속에서 운명을 기다려야 한다.

만약 파면된다면 칩거에서 자발성이 배제된 유폐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헌재가 인용을 선고하면 곧장 삼성동 자택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이사를 도와줄 사람은 있는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 말대로 “옷가지를 챙겨주던” 최순실씨는 구속돼 있어 옴짝달싹 못한다. 문고리 3인방도 도움이 안 된다. 피붙이인 동생들이 살갑다면 그나마 견딜 만할 텐데 이도 저도 아니다. 꽃이 피는 봄이 오고 있건만 청와대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