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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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3·12 만세 시위 주역 북간도국민회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간도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간도는 만주 길림성 동남부지역을 말한다. 간도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2일 서간도 지방의 중심지인 류허(柳河)현 싼위안바오(三源堡)와 퉁화(通化)현 진더우(金斗)에서 시작됐다. 이 지역에서는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하고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북간도의 중심지이자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에서도 그해 3월 12일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날 정오, 천주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용정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는 1만명가량의 한국인이 모여들었다. 용정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거의 다 참석했고, 인근 40㎞(100리) 안의 동포가 대거 몰려들어 독립축하회 식장을 메웠다. 독립축하식은 김영학(金永學)의 ‘독립선언포고문’의 낭독으로 시작됐고,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만세시위행진을 벌였다.

1919년 3월 13일 일어난 만세시위가 시작된 연길현 용정촌 서전대야 자리. 지금은 용정 제1유치원이 들어서 있고 앞마당에는 ‘3·13반일집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그러나 이 계획을 사전에 알아챈 일본은 중국 관헌과 합동으로 멍푸더(孟富德)가 거느린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만세운동을 저지하게 했다. 멍푸더의 중국 군대는 선두의 대한독립기를 빼앗고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만세운동에 참가한 18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간도지역 독립만세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돼 17일에는 용정, 20일에는 훈춘, 26일에는 백초구, 31일에는 고집지로 이어졌다.

간도의 만세시위는 북간도국민회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북간도국민회는 1910년대 간도 이주동포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처음에는 연변교민회로 만들어져 김약연·구춘선·김영학·마진·강백규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1914년 이동휘가 명동에 온 것을 계기로 구국운동으로 활동 방향을 높일 것을 맹세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계기로 명동을 본거지로 하여 명동중학교를 설립했다. 이상설이 세운 용정의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정신에 입각해 현대적인 교육을 실시하자 한국·중국·노령 등지에서 유학생이 모여들었다. 북간도국민회는 이 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을 삼아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드높이는 데 주력했다.

류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