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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삽자루의 천민통신](4) 계림문고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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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받았다. 1975년생을 찾아달라 했다. 1983년생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1975년생을 찾았다. '작은 아씨들' 이라는 널리 알려진 원제 대신에 '푸른 화원'이라는 번역제를 이름으로 썼다. 계림문고다. 잘사는 친구네 책장 한 면에 계몽사, 삼성당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 '세계위인 전기' 같은 전집이 있었단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 이들에게는 국민학교 도서관마다, 혹은 낱권으로 문방구에서 팔리던 계림문고가 있었단다. 사각의 책장(冊張)은 소년소녀들이 뛰놀던 꿈의 운동장이었단다. 흙수저, 쇠수저, 금수저에게도 모두에게 똑같은 480원(1976년 기준)이었단다. 의뢰인은 어릴 적 '다렐르 시리즈'를 보며 발랄한 대학 기숙사 생활을 꿈꿨단다. 숙녀가 된 의뢰인에게 허락된 캠퍼스의 낭만은 수십만원의 월세가 붙은 단칸방과 수백만원 학자금뿐이었다.

좋은 책 많은데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만화가 이현세의 책들. 낡을 대로 낡았지만 지금은 쉽게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값어치를 지닌다.
공상과학소년이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각 면마다 4컷 만화가 있는 잊혀진 이름의 세계일주 시리즈가 좋았다. 별자리가 좋았고 우주과학이 좋았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보며 아직 알지 못하던 곳에는 재미 있는 세계가 있으리라 상상했다. 우주 너머에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 상상했다. 구 소련 과학자 치올코프스키를 동경하며 친구와, 너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나는 로켓과학자가 되자는 다짐도 했었다. 십여년이 지나고 우연히 만난 친구는 옛날의 맹세 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 나 자체를 잊은지 오래였다. X-파일 시리즈를 열광하면서 음모론주의자가 됐다. 예전 고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의 사연에는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우연찮게 다가올 외계문명을 기다리는 고독한 한 남자를 아버지로 둔 딸의 하소연이었다. 여전히 철부지인 '어른아이'에 대한 '뒷담화'였다.

불황형 소비가 인기다. 인형뽑기방이 두달새 배이상 늘었단다. 코인 노래방엔 동전이 쌓여가고 무한리필 삼겹살집엔 배고픈 청춘들이 득실거린단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보다 당장 나를 위한 소소한 선물이 잘 팔린단다. 예전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계획이 있었다. 명목소득은 제자리요, 실질소득은 날로 줄어가는데, 집값은 콧대가 높다. 빚이나 가산 탕진 없이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꿈이 됐다. 사회는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조건을 맞추려면 출발점부터 신용불량자가 돼야 한다. 헬조선은 예사말이 됐다. 누가 헬조선을 만들었는가. 누가 우리에게 헬조선을 물려주었는가. 어떻게 헬조선을 탈출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못주고 있다. 답을 찾을 노력조차 없다.

의뢰인은 푸념했다. 돈 벌기 힘들어서 뱃속 편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다며 한탄했다. 우리 국민의 주머니 사정이 점차 나아지고 있긴 하다. 국가적 위상도 뒤쳐지진 않는다. 먹을 게 없어서 먹던 꽁보리밥이나 곤드레 나물도 별미로 먹는다. 절대적인 삶의 여건은 분명 개선됐다. 상대적인 삶은 점점 격차를 더하고 있다. 흙수저, 쇠수저, 금수저에 모두 똑같던 480원은 추억일뿐이다. 탈옥수 지강헌은 1988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SNS에 회자되는 재벌 후손들의 비행은 집행유예로 결론난다. 가진 자의 갑질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다들 살기 힘들어 하는데, 살기 힘든 세상을 만든 건 과연 누굴까.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