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로 내정된 이선애(50) 변호사가 지명 후 밝힌 포부다.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해 정식으로 임명되면 헌재 역사상 3번째 여성 헌법재판관이 된다. 헌법재판관과 대법원의 대법관을 통틀어 7번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발족한 것이 1948년으로 거의 70년이 돼 가는데 여성 헌법재판관·대법관이 7명뿐이란 점은 우리 법조계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첫 여성 헌법재판관 탄생은 2003년, 첫 여성 대법관 배출은 2004년으로 비교적 최근의 일에 해당한다.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 사법의 역사를 새로 쓴 여성 헌법재판관·대법관들을 소개한다.
◆전효숙 헌법재판관(2003∼2006년 재임)
전효숙 전 헌법재판관 |
그는 2004년 지금의 세종시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려는 노무현정부 정책이 위헌이라며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에서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란 다수의견에 반대해 “수도 이전은 합헌”이란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같은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선 재판관 9명 중 유일하게 ‘각하’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전 재판관은 여성으로는 처음 헌재소장에 오를 뻔했다. 2006년 윤영철 헌재소장이 물러났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새 헌재소장 후보로 지명한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7기 동기생인 그의 헌재소장 기용은 ‘코드인사’라는 야당의 반발 속에 국회 인준안 통과가 어려워졌고, 결국 노 대통령은 그의 후보 지명을 철회했다. 헌재를 떠난 뒤에는 모교인 이화여대 법대 및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대 로스쿨 원장, 대법원 양형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다.
◆김영란 대법관(2004∼2010년 재임)
김영란 전 대법관 |
그는 2009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 상고심에서 6(무죄) 대 5(유죄)로 무죄를 선고했을 당시 유죄 취지 소수의견에 합류하는 등 재벌에 엄격한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여성이나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 관련 사건에선 인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에 섰다.
김 전 대법관은 임기만료로 퇴임한 이후인 2011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그가 위원장을 지내는 동안 권익위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초안을 마련했다. 그 때문에 이 법률은 지금도 ‘김영란법’으로 불린다. 김 전 대법관은 약 2년간 권익위를 이끌며 우리 공직사회에 청렴의 문화를 보급하는 데 앞장섰으나, 2012년 대통령선거에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가 후보로 출마하자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 아쉬움을 남겼다.
◆전수안 대법관(2006∼2012년 재임)
전수안 전 대법관 |
그는 일선 법관 시절부터 대기업 임원의 횡령·배임 등이 문제가 된 형사사건에서 엄중한 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법원 입성 후에도 앞서 언급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 취지의 소수의견에 가담했다. 성범죄 등 여성 인권을 침해한 범죄의 양형 또한 매우 엄격했다.
전 전 대법관은 문학에 일가견이 있어 연설문 등에 시를 곧잘 인용했다. 2006년 대법관 취임식 때 문정희 시인의 ‘먼길’을 읊었던 그는 2012년 퇴임식에선 같은 시인의 ‘내가 한 일’을 낭송해 화제가 됐다. 대법원을 떠난 뒤에도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헌재에서 열린 공개변론에 참석하는 등 인권문제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정미 헌법재판관(2011∼현재)
이정미 헌법재판관 |
그는 2014년 옛 통합진보당이 북한 정권을 추종하고 우리 헌법을 무시한다며 제기된 위헌정당해산심판 사건에서 “통진당은 위헌정당이므로 해산해야 한다”는 다수의견 편에 섰다. 반면 헌재가 2015년 재판관 7(위헌) 대 2(합헌) 의견으로 간통죄를 폐지했을 때에는 “간통죄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란 다수의견에 맞서 “간통죄가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순기능을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 재판관은 지난 1월31일 박한철 헌재소장이 물러난 뒤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은 그의 임기 중 마지막이자 가장 큰 사건이 될 전망이다. 그는 오는 13일 퇴임을 앞두고 있으며 이선애 변호사가 후임 재판관으로 내정된 상태다.
◆박보영 대법관(2012∼현재)
박보영 대법관 |
그는 이혼 후 자녀를 홀로 키운 ‘싱글맘’으로 알려져 있다. 국회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치마 대신 바지정장을 입고 출석해 눈길을 끌었다. 여성과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 보호에 앞장서는 판결을 내려왔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혼에서 기존의 ‘유책주의’를 고수할지, 아니면 새롭게 ‘파탄주의’를 택할지 논의한 끝에 7대 6으로 유책주의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을 당시 다수의견에 섰다. 이를 두고 박 대법관의 입장이 다소 보수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유책주의란 외도 등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는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없다는 원칙이고, 파탄주의는 누가 잘못했는지와 상관없이 혼인이 사실상 파탄에 이르렀다면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김소영 대법관(2012∼현재)
김소영 대법관 |
그는 일선 법관 시절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오래 근무하며 주요 범죄의 양형기준안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 양형 전문가로 통한다. 대기업 임원 등이 연루된 횡령·배임 범죄와 성범죄 등 여성,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서 특히 엄격한 양형을 유지해왔다.
김 대법관은 여성 판사로는 처음 일선 지원장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내한했을 때 한국 대법원을 대표해 긴즈버그 대법관과 ‘최고 사법기관의 역할’을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가졌다.
◆이선애 헌법재판관 내정자
이선애 헌법재판관 내정자 |
그동안 법무부 차별금지법 특별분과위원회 위원,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회 위원, 한국여성변호사회 이사,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지명 발표 후 기자들과 만나 “아직 내정자에 불과하고 청문회가 남아있으니 소감을 말씀드리는 것이 조심스럽다”면서 “여성과 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하고,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