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백영철칼럼] 나라의 운명

이념·지역도 모자라 세대까지 분단 / 또 다시 열강의 놀이터 된 한반도 / 관념론과 명분론으론 나라 못지켜 / 생존위해 이젠 국가 대혁신 나서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오늘 내려진다. 자욱한 안개가 마침내 걷히는 것이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뭐가 남아 있을까. 승자의 환호와 오만, 패자의 증오와 저주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햇볕에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암담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기울고 있는 국운이 그것이다.

지난 석 달 동안 이 나라는 남북으로, 영호남으로, 진보와 보수로 찢어진 것도 모자라 세대대결로 쩍 갈라졌다. 태극기부대와 촛불시위에 따로 참석하는 부모와 자녀는 서로 말도 섞지 않는 사이로 벌어졌다. 그래도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 이에 “우리 사회 시스템이 정착됐고, 남다른 민족의 저력 덕 아닌가”라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걸 두고 “착각도 병”이라고 말한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한국인에겐 조선 왕조의 DNA가 면면히 흐른다. 조선의 지도층은 상무정신과 기술입국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일보다 관념론과 명분론에 빠져 우리끼리 싸우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의 저자 정병석은 “고려말 거듭된 외침의 영향으로 조선 초기엔 부국강병책 논의가 많았지만 중기로 가면서 사대부 지배층은 책임회피 차원에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획일적 성리학에 빠졌다. 포용과 통합의 정신이 사라지면서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뺏긴 그 무렵에 정쟁은 더 심해졌다”고 썼다.

1592년부터 1636년까지 44년은 우리 역사에서 혹한기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 기간 백성이 짐승처럼 연명하는 동안 왕과 관료들이 권력과 특권을 지키느라 뭘 했는지를 보면 치가 떨린다. 왜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뒤 정묘호란을 당한 것도 부족한지 인조와 조정관료들은 한심한 주제를 두고 싸운다. 그들은 인조의 생모가 죽었을 때 3년상으로 하느냐 1년상이 맞느냐, 선조가 인조의 아버지인가 할아버지인가와 같은 것을 두고 다퉜다. 그러면서 조세제도 개혁 같은 국가쇄신은 외면했다. 왕실이 보유한 어장과 염장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전란이 임박해지자 대사간이 군비마련을 위해 특혜를 폐지하자고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단호히 기각했다.

인조실록은 기록한다. “그대들은 늘 존망이 걸려 있다고 간쟁하지만 이 때문에 위망의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마라.” 시스템이 나빠서 조선이 동네북이 된 게 아니다. 무능과 무책임으로 똘똘 뭉친 지도층 잘못이 크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조선이 망한 그 길로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이다.

헌재서 탄핵이 인용되면 한국은 대통령이 탄핵당한 나라로 세계에 알려지고 두고두고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이런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국가혁신을 두고 경쟁해야 마땅하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국민통합을 지향하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의 구멍난 곳을 메우고 튼튼하게 만드는 데 진력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조기대선을 준비하는 야권 선두주자들은 혁신과 쇄신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벌인 ‘적폐청소론과 대연정론’, ‘분노론과 선의론’ 논쟁은 조선의 관념론과 오십보 백보다. 여권과 보수진영에서 내놓는 반법치, 반민주주의 언행도 조선시대를 방불케 할 뿐이다.

나라 밖은 살벌하다. 근육질 남자들이 에워싸고 치고받으며 힘자랑을 벌이고 있다. 치기 어린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노회한 중국 시진핑 주석은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에 연일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 둘을 상대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국익을 위해선 지옥이라도 갈 의지의 지도자들이다. 구한말에 이어 한반도가 열강의 놀이터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라 안팎이 위태로운 이 시대 정치인들이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려면 청소나 혁명보다 국가 통합에 나서는 게 급선무다. 미·일·중·북·러 지도자와 어깨싸움을 해내면서 줄 것 주고 받을 것은 확실히 챙겨 나라를 지켜야 한다. 그런 역량과 배짱을 지닌 큰 그릇의 지도자가 절실하다. 탄핵정국의 안개가 걷히지만 더 깊고 어두운 터널로 빨려드는 형국이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