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터에 그들은 최소한의 품격도, 한 방울의 연민도 지키지 못했다. 숱한 물증과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안면몰수하고 막가파식 대응으로 일관했다. 변호인들은 진검승부 대신 꼬투리잡기, 시간끌기, 장외선동으로 역사적 탄핵심판을 희롱했다.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할 친박 무리는 장외로 달려가 가짜뉴스에 꽂힌 ‘아스팔트 우파’들을 선동했다.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던 대통령은 그 대한민국이 두 동강이 나도록 끝내 애국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결과 헌법가치 위배 여부가 본질인 탄핵심판은 장외에서 좌우 대결로 변질돼버렸다.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
20년 전에도 큰 파산이 있었다. 그땐 정권이 아니라 나라였다. 대외지불능력(외환보유액)이 바닥나면서 나라가 부도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신탁통치’가 시작됐다. 대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자가 쏟아졌다. 고통이 컸지만 회복은 빨랐다. 1998년 5.5% 뒷걸음질친 경제는 1999년 11.3%, 2000년 8.9% 성장했다. 39억달러까지 빠졌던 외환 곳간은 3년 만에 1000억달러 수준으로 불어났다.
20년 시차의 ‘국가 파산’과 ‘정권 파산’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때 그랬듯 정권교체는 필연이다. 그러나 회복 과정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대한민국호를 이끌 새 정부는 국가 부도사태 때보다 훨씬 더 길고 거친 항로를 견뎌내야 할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고도성장기의 ‘유동성 위기’였을 뿐이다. 성장엔진(잠재성장률)은 생생했고 세계경제는 호황이었다. V자 반등이 가능했던 이유다.
지금은 위기의 성격도, 조건도 다르다. 청년실업, 가계부채, 노인빈곤 등 양극화, 고령화의 구조적 문제와 정책 실패의 잔해가 첩첩이고, 성장엔진은 동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한마디로 저성장 터널에 갇힌 ‘구조적 위기’다. 나라 밖 상황은 설상가상이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마당에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와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상징되는 미·중 G2의 패권이 한반도 안팎에서 으르렁대고 있다.
‘박순실 정권’의 잘못은 국정농단만이 아니다. 잿밥에 한눈팔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야말로 나라를 수렁에 몰아넣은 중죄다. ‘국가의 시간’을 훔쳐 삿되게 낭비한 셈이고, 그 결과 경제위기가 심화했으며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허물어졌다. 경제정책만 해도 “위기의 본질, 원인도 파악하지 못한 채 돈 풀어 부동산 경기를 띄우는 옛날식 대책으로 위기만 키운다”(조순 전 한국은행 총재)는 비판이 나온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새 정권은 전 정권의 무능과 오만이 심판받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 갈 길이 멀고 험하지만 급할 건 없다. 경제성장률, 국가순위 등을 버무린 ‘7·4·7’(이명박 정부), ‘4·7·4’(박근혜 정부) 따위의 숫자놀음부터 중단하기 바란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해도 온갖 모순을 숨겨놓은 경제지표가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앞서 허물어진 신뢰를 세우는 게 급선무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멈춘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경구를 새기는 것도 좋겠다.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 그게 경제대책의 첫걸음이다.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