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운명의 향배를 짊어졌던 헌법재판소가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까지 지난 90여일 동안 헌재 안팎의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헌재로선 13년 만에 다시 대통령 탄핵심판을 맡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이었음을 방증한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기에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가 위치한 서울 종로구 재동은 대법원과 대검찰청 및 서울중앙지법·지검 등이 몰린 서초동과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여서 법조인들이 선호하는 일터다. 그러나 이번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헌재 직원들은 “‘절간’ 같던 곳이 ‘아수라장’이 됐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온 국민이 탄핵심판의 과정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만큼 헌재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청사 2층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사무실에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고, 재판관 집무실과 회의실 등에는 최신 도·감청 시설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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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주재로 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평소 점심 식사 이후 헌재 건물 뒤편의 백송 나무 아래에서 직원들이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모습도 이 기간 동안은 자취를 감췄다. 직원들은 헌재 청사와 멀리 떨어진 인사동이나 종로, 광화문 근처에서 끼니를 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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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주재로 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등 재판관들도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집무실 안에서 도시락을 배달해 먹거나 청사 내 구내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식사 후 헌법연구관이나 직원들과 함께 하던 ‘산책시간’도 생략했다. 특히 지난 1월31일 퇴임 전까지 재판부를 이끌었던 박한철 전 헌재소장은 헌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감사원 내의 단골 이용원으로 가는 발길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접수 이후 매일 진행되던 평의 역시 최종변론을 기점으로 격렬해졌다고 한다.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짧은 신경전이 일기도 하고 무거운 침묵이 깔리는 등 심판정 못지않은 팽팽한 긴장상태가 계속됐다는 전언이다. 이 과정에서 탄핵사건 주심이기도 한 강일원 재판관이 의견 조율을 위한 균형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긴장감은 이날 선고 직전까지 계속됐다. 강일원·김이수·안창호 재판관은 평소보다 1시간여 빠른 오전 7시30분쯤 출근했다. 이들은 “결정을 하셨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기석·조용호 재판관도 11시 선고 전에 있을 ‘평결’ 절차를 위해 조기 출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 잠시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선고를 앞두고 긴장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머리를 마는 데 사용하는 ‘헤어롤’ 두 개를 미처 떼지 못하고 출근하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