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관통하는 핵심 구절이다. 성장기에 ‘데미안’을 거치지 않은 문학청년이 없을 정도로 헤세의 저 구절은 널리 회자되는 명구다. 혼돈스러운 세상을 자신의 의식으로 평정하고 깨달음을 얻는 황홀한 경지란 누구나 한번쯤 꿈꾸고 싶은 것일 터이다. ‘나무옆의자’ 로만컬렉션시리즈 10호로 나온 소설가 이평재(사진)의 ‘아브락사스의 정원’은 바로 이 구절에 살을 붙인 거침없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다.
‘데미안’이라는 카페에서 일하는 미대생 ‘마리’와 이 카페에 매니저로 합류한 기연. 패션모델이 꿈인 기연이라는 남자는 마리를 한눈에 품게 되고 그녀의 어려움을 막아주면서 뜨거운 관계로 나아간다. 마리가 기연에게 선물한 르네 마그리트의 ‘설산’은 산맥의 얼음을 깨고 기지개를 켜면 금방이라도 하늘을 항해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는 거대한 독수리 그림이다. 마리는 기연에게 다짐한다.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이 그림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곤 해. 내가 이 앞의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이라고 생각하고, 저 뒤 배경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두렵지 않거든. 이제 곧 알에서 깨어나 독수리가 되어 설산을 향해 힘차게 날아갈 테니까.”
기연의 꿈인 패션모델을 성취시켜주는 패션디자인계의 실력자 이지민. 다이애나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녀는 기연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접근해 그를 자신의 노리개로 품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도와준다. 기연은 마리에 대한 사랑을 접을 수 없어 이중생활을 하는 탓에 다이애나의 보복으로 그로기 상태에 놓인다. 한편으로는 출세를 위해 다이애나가 종용하는 천박한 접대와 약물에까지 함몰되는 생활을 한다. 데미안에 푹 빠졌던 마리는 이 세상이야말로 선악과 악이 뒤섞인 신의 정원이라고 설파한다.
“이 마그리트의 설산은 희망을 얘기하지만,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는 천사와 악마를 공유하면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완전한 신을 뜻하거든. 그래서 나는 데미안을 다섯 번쯤 읽어본 결과 이런 생각을 했어. 싫든, 좋든 아브락사스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고,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과연 그러한가. 강렬한 성애 묘사와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 솜씨로 끝까지 단숨에 읽히는 이 소설은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진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완전한 신의 세상이라는 언설이 서글프고 몽롱할 따름이다. ‘마리’처럼 ‘데미안’에 빠졌던 이평재가 데뷔 초기에 써놓았던 미발표작으로, 15년 만에 햇빛을 본 작품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