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이런 성공은 누가 만든 것일까. 물론 누가 뭐라 해도 본인을 먼저 꼽을 수밖에 없다. 타고난 재능과 끝없는 열정, 피나는 노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혼자 힘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게 세상사 이치다. 이번에 최승희 관련 자료를 다시 한 번 섭렵하면서 또다른 성공 요인에 주목하게 됐다.
1929년 겨울에 찍은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최영희·최승희, 뒷줄 오른쪽이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석금성 부부. 영화배우 석금성은 시누이 최승희의 무용에 대체로 무관심했다고 전해진다. |
최승희의 성공은 가족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 가족의 범주에는 남편 안막이나 딸 성희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 친정과 시가 식구들이 거의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그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가족이 최승희 큰 오빠 최승일이다. 최승희를 무용세계에 입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최승일은 최승희의 무용세계에도 남편 안막 못지않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일본, 중국, 그리고 북한까지 따라다니면서 온갖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승희는 오빠 최승일과 10살 터울이다. 그래서인지 최승일은 어린 시절부터 최승희를 유난히 자상하게 챙겼다. 최승희는 늘 “예술가인 오빠를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최승희가 “어려서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고 소설 읽기를 좋아했던 것”도 ‘문학을 하는 오라버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최승희 고백에 따르면 “오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옳은 말이고, 오빠가 하던 행동이면 무엇이든지 좋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최승희의 운명이 무용가로 바뀐 것은 1926년 3월 20일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 서울 소공동 경성 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첫 경성 공연을 오누이가 함께 구경갔던 날이었다. 공연 관람 도중에 오빠는 누이에게 “너 저것 좀 배우지 않겠니?”라고 넌지시 물었다. 최승희의 대답은 뜻밖에도 “정말 나는 배워볼 터이에요”였다. 말 그대로 최승희 운명을 바꿔 놓은 오누이 사이의 짧은 대화였다.
최승희는 이날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오빠와 사이에 있었던 이날 일화를 직접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겼다. 잡지 삼천리 1936년 1월호 ‘나의 무용 10년기’, 조광 1940년 9월호 ‘나의 무용 15년’이 그것이다.
사실 당시 최승희는 무용에 대해서는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최승희의 표현을 빌리면 “무용이란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무용을 구경하여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무용이 무엇인지 호기심을 보이는 누이에게 오빠는 “무용은 춤이지. 그리고 예술이지”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최고의 역사를 가진 예술’임을 강조했다.
1929년 겨울 서울 남산 기슭에 최승희창작무용연구소를 개원할 당시의 최승희. |
최승희가 무용의 길을 망설일 때 최승일은 “조선에 음악가는 여지껏 많이 났으나 무용가는 하나도 나지를 아니하였으니 네가 그 선구자가 되라”는 말로 결심을 굳히도록 이끌었다. 무용하는 것을 마땅찮게 여겨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는 일도 최승일이 도맡아 주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최승일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거라. 한번 정하였거든 곁눈질하지 말고 나아가거라”라면서 누이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최승일은 1926년 4월에 일본으로 떠난 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해 8월 초순에 직접 도쿄로 건너간다. 최승일이 누이와 만난 곳은 이시이 바쿠가 함께 마중나온 도쿄역에서였다. 잡지 별건곤 1926년 11월 창간호에 실린 ‘신변잡사’란 제목의 최승일이 쓴 글에서 그는 그 전말을 길게 언급하고 있다.
이 글에서 최승일은 서너 달 만에 누이와 해후하는 장면을 “어디서인지 ‘오빠’하고 달겨드는 애는 오래 그리웠든 나의 동생 승희였다”고 적으며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오누이는 곧바로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로 직행해서 그날 밤 이시이 고나미(石井小浪) 방에서 “집안 이야기, 저 지내는 이야기, 내가 이르는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다. 최승일은 당시 최승희를 만나고 나서 “어린 누이동생의 성장되어 가는 예술의 싹, 춤의 포스를 쳐다볼 때 나는 여간한 만족을 느끼지 않았다”고 앞으로의 기대감을 내보이고 있다.
최승희의 일생에서 남편 안막을 빼고는 최승일이 가장 오랜 시간 곁에 있었다. 최승희가 결혼하기 전에는 공연 기획자와 매니저 역할을 최승일이 담당했다. 최승일이 특별히 직함은 없었지만 누이의 타고난 재주를 지극히 아끼는 오빠였기에 기꺼이 떠맡은 짐이었다.
최승희는 1929년 8월 이시이 바쿠 품을 떠나 일본에서 1차 귀국했다. 이때 “제일 놀란 사람은 오빠였다”고 최승희는 나중에 회고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경성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3년 동안 운영했다. 그때 최승희의 친정 아버지 최준현(崔濬鉉)이 건물을 지키며 관리 일을 거들었다.
최승일은 이때 연구소 운영까지 책임지면서 누이가 무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최승희는 1년에 봄, 가을로 신작무용발표회를 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지방순회공연을 자주 다녔다. 무용연구소 개설 이듬해인 1930년을 예로 들면 최승희는 2월 1~2일 경성에서 첫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최승희는 이틀 뒤 개성을 시작으로 5월 부산 공회당, 6월 평양, 9월 청주에서 공연을 했다. 또 한 해는 3월 경성 단성사, 4월 경성 공회당, 6월 경성 천도교기념관, 10월 다시 경성 단성사, 11월 경성 여고생 학생상조회 자선공연 등으로 1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지방공연에도 웬만하면 동행했던 모양이다. 당시 최승일의 부인이던 석금성(石金星)이 기자에게 이런 볼멘소리를 내뱉고 있다. “우리 사랑 양반(문사 최승일군)은 밤낮없이 승희(무용가 최승희가 승일군의 누이이다)의 지방 흥행에 따라다니니까 집에 계신 날이라야 며칠 되지도 않는답니다.” 잡지 별건곤 1931년 11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다. 최승일은 부인이 이런 시샘을 할 만큼 누이를 살뜰히 챙겼던 것이다.
최승희에게 최승일은 어쩌면 남편 안막을 대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안막의 빈자리를 때로는 최승일이 메우고 있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945년 중국에 있던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에게 급히 건너오라는 요청을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즈음 안막이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정치를 하겠다”며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延安)으로 갑자기 떠나 버렸다. 이곳은 나중에 연안파라 불리는 좌파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최승일은 일제의 군국주의 찬양 영화 출연을 강요받고 1944년 9월 일본군 위문 명목으로 중국 공연 길에 나선 최승희를 따라서 거처를 옮겼다.
최승일은 만사를 제치고 중국으로 달려갔다. 당시 최승희는 베이징 시내에 집을 마련해 ‘최승희동방무도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무용을 창작하고, 공연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최승희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최승일은 작품 기획에서부터 매니저 역할은 물론 연구소 살림까지 무거운 짐을 기꺼이 떠맡아 주었다.
최승희가 월북한 뒤 평양에 설립된 최승희무용연구소는 한때 최승희, 안막 일가가 같이 일하는 일터이자 함께 사는 집이기도 했다. 최승희 친정식구로는 큰오빠 최승일, 그의 두 딸 로사, 마샤, 그리고 둘째오빠 최승오까지 동반해 월북했다. 최승일의 부인 석금성은 남편의 월북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결국 따라가지 않고 남한에 남았다.
여기에 최승희의 시댁 쪽에서는 안막 동생인 안제승·김백봉 부부까지 가세했다. 안제승은 평양에 설립된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1951년 1월 일가족과 함께 월남할 때까지 살림살이는 물론 의상·무대장치 등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최승희를 중심으로 한 친정, 시댁의 대가족이 무용연구소 1층 살림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최승희의 무용 사업을 뒷받침했다.
최승희의 무용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뭉친 셈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최승희 무용을 대표상품으로 하는 가족 기업에 비유할 수 있겠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