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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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틸러슨 동북아 방문의 교훈

美 국무장관 첫 순방 혹평 받아 / 트럼프, 북핵 해법 응징·협상 갈등 / 한국 외교 치열함 없어 자중지란 / 대선까지 절체절명 시간 인식을
동북아 3개국 방문을 마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혹평을 받았다. 상원 인준 청문회 이후 쏟아진 호평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중국 방문에 유독 관심을 보였던 워싱턴 정가에서는 틸러슨이 중국에 외교적 승리를 안겨줬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전했다는 ‘상호존중’ ‘핵심이익’ ‘윈윈 관계’ 등 발언은 보수파들로부터도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기대했던 발언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요구하는 주장은 없었다. 중국에 앞서 찾은 한국에서는 ‘만찬 제안을 받지 않았다’는 인터뷰 발언으로 방문국에 외교적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북한 관련 발언을 내놓지 않은 틸러슨은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는 끝났다”며 “모든 옵션은 테이블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대북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이야기지만, 대응 방안을 찾지 못했다는 실토이기도 하다.

북한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어려운 과제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켄터키주에서 지지자들을 상대로 북핵 문제를 언급하며 버락 오바마 전 정부로부터 ‘엉망진창 상황’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은 수치스럽고 현명하지 못했다고 일갈했다. 앞서 대선 유세에서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폭군으로 지칭하면서도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협상할 수 있다고 했다가 취임한 뒤에는 “(김정은을 만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는 대북 문제에 대해 여전히 ‘협상’과 ‘응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설이 분분했던 선제타격과 협상 사이에서 미국의 선택지는 점점 좁혀질 것이다. 최근엔 이란에 가했던 ‘경제적인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다각적인 압박 방안이 부각되고 있다. 백악관은 3월 말까지는 대북 방안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북핵의 직접 당사국인 우리 입장이 어느 정도 담길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미국은 대북 방안을 공개하더라도 차후 변화 여지는 남겨둘 것이다. 4월 미·중 정상회담과 5월 한국의 대선 일정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북한은 그 사이 확보된 시간을 유리하게 조성할 수 있다. 한국의 대선 전에 도발하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을 방문했던 김영우 국회 국방위원장도 워싱턴특파원들을 만나 이런 시각을 전했다.

박종현 워싱턴 특파원
난감한 입장에 처한 것은 한국 정부이다. 우리 외교는 박근혜정부가 지운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긴박하게 변하는 동북아 외교 지형에서 박근혜정부가 우리 외교에 끼친 해악은 참사 수준을 능가한다. 일본에는 위안부 협상 등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서도 비판을 받고 있으며, 중국과 미국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둘러싼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했다가 협상 당사국 지위마저 내려놓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렸다.

외교가 자중지란 상태에 놓여있지만, 주무 부처엔 치열함이 없다. 긴박함도 없고, 구체적인 대응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한국의 대선 정국을 즈음해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워싱턴을 찾고 있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북핵 현안이 아닌 ‘반이슬람국가(IS) 외교장관 회의’ 참석을 주요 목적으로 두고 최근 미국을 방문했다. 윤 장관 등은 양국이 돈독한 이해 속에 동맹을 유지하기로 했다는 식의 오래된 문장만 들려줬다. 일부 외교관들마저 ‘보여주기’식 미국 방문에 나서는 고위층 행보를 비판하는 이유이다. 대선 당시 ‘트럼프 시대’ 대응책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트럼프 정부도 출범 뒤에는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를 내놓았던 게 외교부와 주미 대사관이다. 외교는 제3자의 시각으로 정세를 논하는 한가로운 분야가 아니다. 틸러슨은 외교 문외한이어서 재임 초반에 적응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변명거리라도 찾을 수 있지만, 우리 외교장관과 주미대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4년보다 길게 현직 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외교 전문가들이다. 그들에게 치열함을 요구한다. 대선까지의 1개월 남짓 기간은 우리 외교에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박종현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