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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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한국미술 특질 왕실문화 아닌 일반 백성의 공예문화서 찾아야”

‘조선회화총람사전’ 집필 미술사학자 정양모씨
노학자는 요즘도 연구실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외부 강의도 소화해 낼 정도로 여전히 ‘인생 현역’이다. 요즘은 집필 중인 ‘조선시대회화 총람사전’(가칭)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가의 인장과 서명까지 별도로 상세히 담은 책이다. 후학들을 위한 회화 연구의 기초자료라 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인 정양모(83)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난주 경복궁 인근 연구실에서 만났다.

우선 그의 부친인 위당 정인보 선생의 개인적 면모가 궁금했다. 위당은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고대사를 주로 연구한 인물이다. 위당의 역사학에서 일관된 사상이 ‘조선의 얼’이다. 일제에 말살되어가는 한민족의 얼을 지키고 그 정신적 소산인 말·글·역사, 그리고 한국적인 문화요소를 찾아내 이를 유지·발전시키자는 사상이다. 역사학자이자 한학자인 위당이 국학(국어)에 대단한 애착을 보인 이유다.

“큰 학자셨지만 가정에서는 매우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한 분이었지요. 바른 것만 좋아하시고 비뚤어진 걸 두고 못 보시는 성품이셨습니다. 사람을 쓸 때도 효를 행하지 않는 자는 멀리했습니다.”


경복궁 인근 연구실에서 만난 정양모씨는 “조형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달항아리는 한국 항아리 문화의 절정”이라며 “18세기 춘향전 등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한국소설이 등장하는 시기에 만들어져 한민족의 정서가 무르익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연구실 한편에 표구해 고이 싸둔 위당의 편지글을 꺼내 보여주었다. 위당은 당시 스님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교류했다.

“아마도 이 편지는 박화영 스님에게 보냈던 글일 겁니다. 위당이 오래 살아야 불경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고 늘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지요.”

그는 1962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간다. 당시 미술과에는 한국미의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린 혜곡 최순우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한국미술 전반에 대한 전시와 책 출간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혜곡은 맡긴 일에 일절 간섭을 안 하셨습니다. 책임을 가지고 일을 수행하도록 했지요. 하지만 자문하면 친절히 응하셨어요.”


정양모씨가 부친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글을 살펴보고 있다.
그에게 회화는 물론 자신의 주전공 분야가 된 도자에 대해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곧 출간될 조선시대회화총람사전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김영윤의 ‘한국서화인명사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한국역대서화가사전’ 등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모아 온 자료들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박물관장을 지낸 그도 그림 이미지 등 자료를 구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자료를 입수하기란 연구자들에게 여전히 높은 문턱이라는 얘기다.

“리움을 제외하고는 여러 조건을 달아 접근이 수월치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연구자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풍토 마련이 절실합니다. 데이터 작업이 제대로 안 된 탓도 있습니다.”

그는 집필과정에서 18세기 이후에야 그림에 인장을 제대로 사용했음을 일별해 볼 수 있었다. 그 이전 그림엔 후대에 인장을 찍은 후인이 많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양팽손의 그림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화가인 인물이지요.”

그는 한국미술사 연구의 역사가 깊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중국은 육조시대부터 화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선 전기 강희맹의 화론이 있었지만 추사 시기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될 수 있었습니다. 임란 등 전란으로 그림과 자료 소실도 한몫을 했다고 봅니다. 게다가 고고학마저도 일제에 의해 주도되면서 제대로 된 한국미술사 연구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 학자들은 일본 고분 발굴의 실험 장으로 한국 고분 발굴을 활용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철저히 배제됐지요.”

그는 한국회화사 연구는 광복 이후 유학파를 중심으로 겨우 불씨를 살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공예사와 도자사 연구는 뒷전으로 자연히 밀려나고 말았다.

“아마도 제가 도자사 연구에 한평생을 보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한국 것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 한국 도자와 공예라고 강조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한국·일본 회화는 모두 같아 보여요. 필법도 그렇고 먹그림이라는 점에서 그렇지요. 오히려 한국 미술의 독창성과 우월성은 도자(공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 도자와 중국 도자, 일본 도자 1000여점을 함께 놓고 구별해 내라고 하면 도자에 웬만한 소양만 있으면 누구나 1시간 안에 해낼 수 있지만, 그림은 전문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공예에는 한국의 독창성, 독자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생활에서 우러나왔기에 이념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지요. 그림은 머릿속에서 생각해 내는 거라면 도자기는 머리가 아니라 생활에 맞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그는 한국 미술의 특질을 왕실문화가 아닌 일반 백성의 공예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예를 들어 우리 왕실문화에는 수라 등 원대의 습속이 많아 남아 있습니다. 왕실문화는 별격으로 봐야 하는 이유죠.”

그는 사대부와 중인 문화가 오롯한 우리의 문화라고 했다. 한·중·일 도자의 조형(형태)적 차이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도자는 권위적이고 과장스럽습니다. 한국 도자는 뽐내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지요. 일본 도자는 경쾌하지만 매우 인위적입니다. 곳곳에 기술이 배어 있어요.”

그는 청자의 경우 중국 것은 불투명하지만 한국 것은 투명하다고 했다. 상감청자도 투명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문양이 거의 없는 조선 백자에 비해 중국 백자는 90% 이상 문양이 존재한다는 점도 유별나다. 왜 조선 백자에는 문양이 없었을까.

“우리는 원래부터 자연스러운 걸 좋아했다. 그림(문양)을 그려 넣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지요. 형태를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릴 때도 관성의 법칙에 손을 내맡기는 형식이지요.”

화제는 자연스레 이도다완으로 옮겨 갔다. 그는 이도다완은 원래 경상남도 일원 등 남쪽지방의 백자류에 속한다고 했다. 아주 잘생겨 큰 산이나 큰 강을 보는 듯한 품위가 있다고 평했다. 절대 막사발이 아니라는 얘기다.

“겉면을 굽부터 입까지 한 번에 깎아낸 모습에선 운동감(생동감)이 느껴져요. 천품이 좋은 도공의 무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이도다완은 1300도에서 굽지만 두드렸을 때 맑은 소리가 아닌 쇳소리 같은 둔탁한 소리를 낸다. 남쪽지방의 흙이 내화도가 높기에 완전히 자화가 안 된 모양새다. 열전도율이 낮아 뜨거운 차도 찻잔을 손에 들고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도다완의 우수성을 거론할 때 빼놓지 않는 부분이 굽 주변과 밑의 오돌토돌한 매화피(梅花皮)다. 처음엔 우연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유약이 단순히 물방울처럼 송골송골 맺혀 있는 모양도 있고 기포 구멍이 숭숭 뚫려 투각처럼 떠있는 모습도 있다. 어떤 것은 갈라져 주저앉은(들러붙은) 모습을 띠기도 한다. 매화 등걸을 연상시킨다. 차인과 도공들은 우연의 산물인 이 매화피에서 색다른 미감을 발견하게 된다.

“요즘도 매화피를 구현할 수 있는 도공이 없습니다. 외형만 엉성하게 본떠 매화피라고 하는데 가관이지요. 인위적으로 유약을 뭉쳐 만든 것은 매화피가 아닙니다. 흘러내린 유약이 빙열에 의해 자연스럽게 갈라지고 터지고 튀어나온 것이 매화피입니다.”

그는 한국도자사의 특징은 한국 산업화 역사처럼 중국의 2000년 도자사를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소화해내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 냈다는 점이라고 했다. 문화의 소화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일본은 큰 수혜자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편완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