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셔스 총리는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아열대 국가인 모리셔스는 강수량이 넘치는 천혜의 관광국이다. 건지 농법 전수라니, 웬 홍두깨인가. 또 이미 좋은 양국 관계는 어찌 복원하자는 것인가. 이래저래 황당했지만 상대는 세계 최강국 대통령이다. 총리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모리셔스에 있는 미국 우주기지의 운영 상황에 만족하는지 물은 것이다. 이번엔 닉슨이 놀랄 차례였다. 닉슨은 급히 메모를 휘갈겨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에게 건넸다. “우리와 외교관계도 없는 나라에 도대체 왜 우주기지가 있는 거요?”
이승현 편집인 |
트럼프는 사드 비용만 거론한 게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끔찍한 협정’이라고 했다. 고압적이고 일방적이다. 그 의도를 놓고 돈 문제를 중시하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협상 전술을 경계하는 시각도 엄존한다. 하지만 진정 주목할 것은 트럼프 의도나 전술보다 지리·역사 인식 수준인지도 모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가르쳐주더라고 전하는 인식 수준 말이다. 그런 인식 소유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원칙? 중심? 소도 웃을 것이다. 그런 인식 수준에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상인 본능이 더해지면 최악의 조합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설상가상이다. 한국이 앞으로 어찌 취급될지 알 길이 없다. 한·미 가치동맹? 트럼프는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미국 대외정책의 역사에는 빛나는 장면이 많지만 그늘도 없지 않다. 베트남 정책이 대표적이다.지리·역사 무지로 인한 오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케네디·존슨 행정부 국방장관으로 베트남 확전에 앞장섰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고록에 썼다. “우리의 오판은 이 지역(베트남) 역사, 문화, 정치에 대한 우리의 심대한 무지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중략)… 세계 곳곳에서 같은 실수를 계속하고 있다.”
닉슨의 실수는 그런 흐름의 작은 에피소드다. 미 국무부의 ‘외교관 필독서’가 있다. 하름 데 블레이가 쓴 ‘왜 지금 지리학인가’이다. 블레이는 이 책에서 미국인의 세계 지리·역사 지식이 형편없다고 통탄한다. 국가 지도자들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닉슨이 모리셔스 총리를 상대로 실언을 연발한 이유는 뭘까. 백악관 참모진이 친미 성향의 모리셔스와 반미 성향의 건조한 사막 국가 모리타니를 혼동한 탓이었다고 한다. 국제감각이 남달랐던 닉슨조차 그 혼동 탓에 덩달아 홍두깨질을 한 것이다.
트럼프의 최근 언동이 같은 흐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트럼프는 한국을 어찌 알고 있을까. 그 스스로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누차 밝혔듯이 ‘부자 나라’, 그것도 미국 덕에 국부를 쌓아 올리고도 비용 지출에 인색한 졸부 국가로 한국을 알 공산이 다분하다. 하기야 트럼프는 자국 역사에도 밝지 못해 어제 “초등학교 5학년 또는 그보다도 못한 역사 지식”(예일대 역사학과 데이비드 블라이트 교수)이란 비판을 샀다. 그런 트럼프에게 동북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중심을 잘 잡으라고 주문하는 것은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엿새 후 청와대의 새 주인이 정해진다. 새 정부의 행로는 새 대통령의 귀를 누가 잡는지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트럼프의 한반도 정책도 마찬가지다. 누가 트럼프의 귀를 잡는지에 따라 골격이 정해진다. 주변의 움직임은 이미 부산하다. 중국의 시진핑은 트럼프의 귀를 잡고 동북공정 기반의 허구의 역사를 강술했고,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그제 비공개 통화로 트럼프 취임 후 6번째 귀엣말을 나눴다. 모리셔스를 모리타니로 뒤바꾸는 것 이상의 자국 편향 스토리가 난무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긴 선입견은 역사 문외한에겐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중국, 일본이 내놓을 물질적 이득이 크다면 그 위험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무슨 의미인가. 한국의 새 대통령이 취임 후 국민과 함께 넘어야 할 외교안보의 벽이 결코 낮지 않다는 뜻이다. 작금의 사드 비용 논란조차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대선이 눈앞이니 표심몰이가 급하긴 하다. 하지만 복지 포퓰리즘 경쟁에 몰두할 때는 아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같은, 국민 다수가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공약을 늘어놓을 계제도 아니다.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면서 새 나라를 일구겠다면 트럼프의 귀를 어찌 잡을지 거듭 고민하고 깊이 성찰해야 한다. 외교안보 없이는 국가 미래도 없다.
이승현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