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사이언스프리즘] 어린이에 더 치명적인 환경호르몬

플라스틱 장난감 빨지 않도록 해야
지능 떨어뜨리고 성조숙증까지 불러
1999년 5월 유럽연합(EU)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벨기에 정부는 축산업계가 공급한 닭 사료가 다이옥신에 오염된 것을 알았음에도 4개월이 지나서야 인정한 후 리콜 조치해 달걀, 닭고기, 가축사료를 수입했던 나라들이 큰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이후 벨기에는 40년 이상 장기 집권하던 정부가 바뀌었다. 이 일을 벨기에 다이옥신 파동이라고 부른다.

다이옥신은 맹독성 환경호르몬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특별히 관리하도록 돼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단어인 환경호르몬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이다. 호르몬은 생체 내에서 합성돼 생체 내분비계의 세포 간 신호전달을 담당하는 물질로 성장과 에너지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슐린이다. 환경호르몬은 일본 언론에서 만든 단어로 생활환경 속에서 만들어져 소량으로도 내분비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화합물을 지칭하며, 내분비계 교란물질로도 불린다. 이 환경호르몬은 과학기술 발전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화합물로 생체 내에 들어오면 호르몬 작용에 영향을 주게 되는 해로운 물질이다.


전승준 고려대 교수·물리화학
특히 환경호르몬을 배출시키는 플라스틱류는 지난 200년간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닐봉지, 집 구조재료, 옷, 가구, 어린이 장난감 등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상당수의 물질이 플라스틱이다. 이러한 플라스틱은 소각 과정에서 부산물로 다이옥신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이옥신은 플라스틱 등 고분자화합물이 소각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 목초지나 토양을 오염시키는데 그 토양에서 자란 곡물을 먹은 가축이 오염되는 것이다. 다이옥신은 한 종류의 화합물이 아니라 다이옥신이라 불리는 산소를 가진 육각 고리구조를 골격으로 한 다이옥신유도체 화합물을 통칭하며 여러 과정에서도 분해되지 않고 결국 인체에 유입돼 생체 내 축적되면서 내분비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

내분비계는 생물의 성장과 성적 특징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플라스틱을 만들 때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프탈레이트 계열의 화합물은 생식계와 뇌신경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프탈레이트 계열의 화합물은 어린이 장난감을 만드는 플라스틱 재료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발육과 두뇌 발달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성조숙증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플라스틱에 뜨거운 음식물을 담는다거나 비닐 랩을 전자레인지에 사용하면 환경호르몬이 녹아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환경호르몬이 아기 장난감의 플라스틱에 포함돼 있으면 아기가 그 장난감을 입으로 빨 때 소량 녹아나와 아기 몸에 축적돼 성장과정에서 지능을 떨어뜨린다는 임상결과가 최근 국내에서 발표된 바도 있다.

한마디로 높은 농도로 생명체에 단시간 내 해를 입히는 독극물과 달리 환경호르몬은 상당히 낮은 농도로 장시간에 걸쳐 해로운 효과가 나타나는 물질이다. 이로 인해 아직 환경호르몬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가능성 있는 물질이 상당수 있을 수 있다. 2012년 WHO와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이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적으로 사용되는 800여종의 화합물이 내분비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환경호르몬일 가능성이 있으나 위험성에 대해 충분한 시험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환경호르몬은 일반 사람에게도 해롭지만 성장과정에 있는 어린이에게 장기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기에 더욱 큰 문제이다. 성호르몬에 영향을 미치면 동물의 암수가 바뀌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고, 어린 여학생이 성조숙증을 보이는 것도 그 원인이 환경호르몬일 가능성이 크다.

환경호르몬은 생식기능 저하와 면역계 장애를 일으키고 유전적 돌연변이와 암을 유발하는 등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보건복지와 환경을 담당하는 기관에서는 세계기구와 긴밀한 협조를 해 문제 발견 시 빠른 대처를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전승준 고려대 교수·물리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