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백영철칼럼] 새 대통령의 비장한 첫날

트럼프의 잇단 한국 압박 / 아베·시진핑의 실리주의 /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춰 / 우리도 국익 최우선 해야
마누엘 노리에가가 1983년 최고 권력자가 되자 파나마로 날아가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인물”이라며 축하한 이는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었다. 미국 친구였던 노리에가가 쓸모가 없어지자 6년 뒤 파나마를 침공한 나라는 바로 그 미국이었다. 이라크는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중동지역의 안정을 증진하고 미국의 장기적 이익을 도울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미국의 우방이었다. 그러나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뒤 토마호크 미사일로 바그다드를 불바다로 만들며 사담 후세인을 일거에 제거했다.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협정을 맺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해보려는 대한제국의 목숨을 일본 손에 맡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강대국의 공깃돌에 불과했다. 초강대국이던 미국은 카이로·얄타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호소를 외면하고 탁자 위에서 남북을 분할하는 선을 그었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미국은 두 개의 얼굴로 다가온다. 하나는 서부 영화 속의 존 웨인 같은 정의로운 보안관이다. 그것은 미국이 6·25전쟁 때 피를 흘리며 한국을 지켜준 동맹의 모습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위험천만하다. 국제사회가 만들고 지키는 골대를 제멋대로 뽑아 옮겨버리는 무소불위의 나라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한국 사회에 번지고 있다. 트럼프는 4월 들어 대북 선제타격론으로 한반도를 흔들어 놓더니 “사드 포대를 배치한 대가로 10억달러를 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한국이 사드 배치로 국론이 분열되고 중국에 경제 보복을 당하는 곤궁한 처지는 관심사가 아니라는 투다. 한국을 무시하는 ‘코리아패싱’에다 한·미 FTA를 ‘끔찍한 협정’이라며 일방적으로 “종료시키겠다”고 했다. 미국 대통령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룰(rule)’보다 ‘딜(deal)’을 중시한다.

트럼프는 막말과 기행의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이나 개헌 투표로 독재를 강화하는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의 현실주의 판단 기준으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김정은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칭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모든 게 불투명한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운명이 그의 트위터에서 결정돼버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모두가 정신차려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대선후보들은 그렇지 않다.

대선후보들에게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묻자 문재인·안철수 후보 둘 다 세종대왕을 내세웠다. 선정을 베풀겠다는 의지의 표시인 줄 알지만 엄중한 시국에 너무 태평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래서야 트럼프는커녕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맞상대를 해내기 어렵다.

아베가 어떤 인물을 존경하는지 아는가. 정한론자인 요시다 쇼인이라는 19세기 사상가다. 이 사람은 1850년대에 “일본이 남으로는 호주를 정벌하고 북으로는 조선을 넘어 만주를 삼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런 군국주의자와 평화 시 성군인 세종대왕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아베는 트럼프 앞에서 속이 없는 것 같아도 챙길 것은 다 챙긴다. 트럼프 취임 이후 그와 전화통화를 여섯 번이나 했다. 아베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도, 개헌을 통해 군사대국화의 가속 페달을 밟아도 트럼프는 용인해 줄지 모른다. 시진핑은 트럼프를 유일 초강대국 지도자로 예우하면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억지를 늘어놓았다. 시진핑 식 원교근공책이다. 패권적 중화주의가 발호해도 트럼프는 계산서만 맞으면 눈감아줄 것이다.

10일 취임하는 새 대통령은 비장하게 첫날을 시작해야 한다. 트럼프와 아베, 시진핑은 마키아벨리즘으로 무장해 있다. “동맹에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우리도 철저히 국익 위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트럼프가 코끼리라면 아베는 늑대고 시진핑은 곰이다. 한눈팔면 밟히고 뜯기고 잡아먹힌다. 새 대통령은 새 패러다임의 시대에 맞춰 사자의 심장과 여우의 머리로 위기관리를 시작해야 한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