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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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5년을 결정하던 그날, 취준생들은 어김없이 책을 펼쳤다

 

지난 9일 오후 6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스터디 카페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신모(27)씨는 대통령선거에 참여했느냐는 물음에 “하려고 했는데 어영부영하다 보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대기업부터 중견기업까지 20개가 넘는 크고 작은 회사의 서류전형을 준비하고, 영어회화 스터디 등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그만 깜빡했다고 한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상반기 채용에 대비하고 있다는 신씨의 스케줄 다이어리에 그 어디에서도 ‘사전 투표일’이나 ‘선거일’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OO기업 1차 면접’ ‘△△기업 서류 마감’ 등의 메모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5년간 이끌 차기 정부를 결정하던 9일에도 대학교 열람실과 번화가에 위치한 스터디 카페 등에는 취업준비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들 취준생은 ‘투표하고 놀러가자!’는 슬로건을 ‘투표날에도 공부하자!’로 바꾸고 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나라의 미래보다 ‘내 코가 석자’인 현실에 더 충실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당당한 대꾸였다. 

취업이 늦어져 올해 하려 했던 대학 졸업을 늦췄다는 최모(25)씨 역시 대선 당일 스터디 카페를 찾았다. 

최씨는 “어젯밤 늦게까지 밀린 스터디 과제를 준비하고, 다음주에 있을 면접 예상 질문을 뽑아보느라 늦잠을 잤다”며 “급하게 스터디를 하러 오다 보니 투표하는 걸 깜빡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면접이 3개나 몰려 있어 정신없는 와중에 투표장까지 발걸음을 할 여유는 없다”며 허겁지겁 시사상식 용어집을 펼쳐들었다.
 
이날 최씨와 함께 공부한 동료 6명 중 절반만 한표를 행사했다고 밝혔다. 


심각한 청년 실업률은 젊은 청춘의 이 같은 정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종종 활용된다. 
 
9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들어 한 번도 취업해 본 적이 없는 청년(20~39세)은 9만5000여명으로 집계됐다. 1999년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뒤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수치는 지난해부터 분기마다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올해는 기업의 채용규모가 지난해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취준생들의 불안감을 높여 정치 무관심을 부추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여론조사 기관 리서치앤리서치와 지난달 9일 진행한 ‘2017년 상반기 500대 기업 신규채용 계획’ 조사 결과 응답을 한 200개 기업 중 올 상반기 신규채용 규모가 작년보다 감소할 것이라고 답한 곳은 27개사(13.5%), 신규채용이 없다고 응답한 곳은 18개사(9.0%)로 각각 나타났다. 이처럼 채용을 줄이거나 계획이 없다는 기업(22.5%)이 늘리겠다는 곳(11.0%)보다 2배 넘게 많았다.

지난해 건국대를 졸업한 유모(28)씨는 이날 투표를 마치고 오전 11시부터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유씨는 “주변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대선 주자들 영상에 '좋아요'를 누르고, 투표를 독려하는 사진도 올려 선거에 참여하긴 했지만 내가 한 표를 행사한다고 뭐가 달라지려나 싶다”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내 “빨리 취업하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좀 달라질까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마포구에서 스터디 카페를 운영하는 박지훈(36)씨는 “기업 공채의 면접 전형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지난주 '황금연휴' 때부터 대학생과 취준생으로 북적이고 있다”며 “면접을 준비할 수 있는 6인실이나,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는 방은 전날 예약하기도 힘들다”고 전했다.

19대 대통령선거 출구조사가 발표된 9일 늦은 저녁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스터디 카페의 정경.  취업준비생들은 출구조사 결과가 궁금하지도 않은지 스터디에만 몰두하고 있다. 김지현 기자

이날 오후 8시 이번에는 서울 강남의 스터디 카페를 찾았다. 대선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개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그 시간에도 카페 곳곳엔 여전히 취준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출구조사 결과가 궁금하지 않은지 모두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토익 문제집을 푸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다음주 2차 면접전형을 앞두고 있다는 방모(26)씨는 이날 온라인 취업 카페에서 스터디를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4시간가량 준비에 몰두했다.
 
방씨는 “지난 4일에 사전투표를 하고 왔는데, 누가 되든 약속한 청년공약과 일자리대책은 제발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며 “오죽하면 ‘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배부른 소리라고 말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는 카페를 나서면서 “다음 대선 때는 그럴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면 좋겠다”며 “그런 날이 오겠죠”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김지현 기자 becreative07@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