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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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소설 사랑한 영조·사도의 ‘파국’… 정조는 ‘잡서’라 금지했다

신하들 사도세자 글 읽게하려 소설 권해/영조, 재미에 빠져 공부 더 멀리할까 우려/정작 자신은 자는 것보다 소설 듣기 즐겨/사도세자, 직접 책 편찬할만큼 애정 보여
아들 정조는 “유교가치 위배” 엄히 금해
“일 년 열두 달에서 독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드느냐?” 임금이 세자에게 물었다. 이에 세자는 “한두 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조재민이 아뢰었다. “대개 역사와 소설은 번역하여 읽으면 쉽게 재미가 생기옵니다. 만약 관리로 하여금 일일이 내용을 해석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말씀드리게 하면 세자께서 반드시 깨닫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그것 또한 폐단이 있소. 분명 소설 듣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어 독서는 더욱 꺼리게 될 것이오.”

조선시대 왕의 일과를 기록으로 남긴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홍백화전’ 등의 소설작품을 즐겨 읽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은 영화`사도`의 한 장면

영조 23년(1747년) 10월3일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영조와 사도세자의 일화다. 독서하고 싶은 마음이 1년에 한두 번밖에 들지 않는다는 사도세자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래도 다음 왕위를 이어갈 사람이라면 더욱 정진하고 노력해야 할 텐데 실상이 이러하니 임금이나 조정의 근심도 컸을 것이다. 신하 조재민의 의견처럼 역사와 소설을 알기 쉽게 번역한 것을 읽다 보면 점차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요즈음으로 치면 우선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화 명심보감’, ‘만화 천자문’ 등을 만들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영조는 그랬다가는 소설을 좋아하느라 더욱 공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고 걱정한다. 만화만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작 이런 말을 하는 영조 자신은 소설을 심하게 즐겼다. 영조는 자신의 몸이 좋지 않아 쉬어야 할 때에도 잠보다 소설을 가까이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승정원일기는 영조의 소설 관련 기록에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홍백화전’, ‘남계연담’, ‘탁록연의’ 등의 작품을 언급하고 있다.
영조 어진

영조 34년(1758년) 1월4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도 이 같은 일화를 엿볼 수 있다. 김상로가 “어젯밤에도 밤새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셨으니 오늘 밤에는 신이 읽어드리는 한글소설책을 들으시면서 잠자리에 드시옵소서”라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한글은 잠자리에 드는 방법이 아니오. 한문이 잠자리에 드는 방법이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김상로가 이유를 묻자 “이런 이야기가 있소. 옛날 어떤 부인이 아기가 울자 한문책으로 얼굴을 덮어 주었소. 옆에 있던 사람이 아이 얼굴을 한문책으로 덮는 이유를 묻자, 평소 자기 남편은 한문책만 잡으면 잠이 든다면서 한문책으로 아이의 얼굴을 덮은 것은 재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오. 허니 한문책이야말로 사람을 잠들게 하는 물건이 아니겠소”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김상로는 밤새 잠을 자지 못하는 영조에게 소설을 접해보라고 권하자 영조는 그 말에 이런 농담을 던지며 웃는다.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영조의 소설 향유 방식이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하들이 읽어주었는데, 대체로 유신(儒臣)이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신이란 궁중의 책이나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을 담당했던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를 지칭한다. 영조는 자리에 누워서 편안히 유신들이 읽어주는 소설을 들었다. 소설 듣기가 곧 휴식이었던 셈이다.
사도세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은 소설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사진은 중국소설회모본 표지와 서문, 수록된 그림.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어쨌든 사도세자가 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에만 빠질 수도 있다는 영조의 지적은 정확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가 정말로 소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도세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소설의 장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여기에는 ‘서유기’ 40장면, ‘수호지’ 29장면, ‘삼국지’ 9장면 등을 포함하여 총 128장면으로 그림이 수록되어 있고 나머지 작품들은 1장면에서 5장면 정도 있다. ‘서유기’의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도세자가 그 작품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다. 구중궁궐에 갇혀서 아버지 영조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손오공처럼 세상 밖 모험을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사도세자는 이 그림을 당시 궁중 화가였던 김덕성 등에게 명하여 그리게 했다.

김덕성은 조선 후기 중요한 화원 집안인 경주 김씨 가문으로 신장(神將)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사도세자가 당시 화단에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김덕성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는 것은 소설에 대하여 관심과 애정이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임오년(1762년) 윤 5월9일,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서문에는 많은 소설의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이날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의 인생사가 소설과 다를 바 없다. 

반면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소설을 무척 싫어했다. 정조는 소설에 대해 매우 엄격하여 평소에도 “나는 소설 따위는 읽지 않고, 모든 잡서는 없앴다”고 공언했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글에 소설식의 표현이나 문체가 나오면 심하게 문책하기도 했다. 정조는 소설식 문체를 쓴다는 이유로 성균관 학생이었던 이옥의 과거 응시 기회를 박탈하기도 하고 연암 박지원의 문체 또한 달가워하지 않아 계속 시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정미년(1787년)에 이상황과 김조순이 예문관에서 함께 숙직하면서 당나라, 송나라의 각종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 등을 가져다 읽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임금(정조)께서 우연히 입시해 있던 주서(注書·조선시대 정7품직으로 승정원일기 기록을 담당)를 시켜 이상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하셨다. 때마침 이상황이 그러한 책들을 읽고 있음을 아신 임금께서는 그 책들을 가져다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시고는 두 사람에게 경전에 전력하고 잡서들은 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이상황 등이 그때부터 감히 다시는 패관소설을 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6년(1792) 10월 24일자 기록이다. 실록에서는 이상황과 김조순이 숙직을 하면서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들켜 책이 불태워지고, 두 사람이 결국 파직되기까지 했다. 그들은 감히 다시는 소설을 보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이들이 읽었다는 ‘평산냉연’은 주인공인 평여형, 산대, 냉강설, 연백함의 이름 앞 자를 뽑아 제목으로 지은 중국소설로, 재주가 뛰어난 남성과 용모가 아름다운 여성들의 결연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작품을 재자가인소설(才子佳人小說)이라고 일컫는데, 능력 있고 출중한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연애소설이다. 후에 이상황과 김조순은 각각 반성문을 쓰고서야 겨우 복직됐다. 실록에는 정조가 반성문을 보고 용서한 것이 이들이 젊고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파직까지 당하고 다시 복직을 했으니 이제 다시는 소설을 읽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믿음과 배려로 이상황은 훗날 영의정까지 지낸다.

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 소설에 부정적이었다. 허탄하고 거짓투성이이며 남녀의 사랑을 함부로 그려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즉 소설은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내용을 다루는 나쁜 장르의 이야기책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는지, 우리나라 고전소설의 작가들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전소설을 찾았고 그 덕분에 꾸준히 창작되고 향유되었다. 조선 왕실의 여성들이 봤다는 장서각 소장 낙선재본 소설에 남성들도 독자로 참여하였다. 재미있는 소설 앞에서는 역시 추구하는 가치와 준수할 규범만 지키며 살 수는 없는 것이 세상인가 보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