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초원민족이 유목민족의 기마부대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때문에 초원민족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목민족을 비하하고 멸시했다. 훗날 초원민족은 중원에서 문자를 발명하고 역사편찬의 권리를 갖게 되면서 유목민족에게 모욕적인 이름을 붙였다. 전국시대에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흉노’(匈奴)라 불렀고, 진한시기에는 더욱 강한 멸시의 의미를 담아 ‘호’(胡)라 불렀다.
중국의 민족사학 연구자인 가오훙레이(高洪雷)는 ‘절반의 중국사’를 통해 흉노를 비롯한 중국의 소수민족을 소개한다. 저자는 한족이 중심이 되는 중국 역사를 ‘반쪽’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소수민족의 역사를 더해 진정한 ‘하나’라고 말한다. 책은 중국 공산당원의 교육연수교재로 쓰일 만큼 중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교양도서다.
진나라를 세운 진시황은 “진(秦)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흉노)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79만명의 군대와 백성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사진은 만리장성의 9대 관문 중 하나인 안문관. 메디치 제공 |
이에 저자는 “역사학자 대부분은 중원 왕조의 흥망성쇠만 기록하고 여러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가끔 언급해 왔다”면서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50여개 소수민족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인 왕소군은 혼인을 통한 화친을 위해 흉노로 시집을 갔다. 사진은 내몽골 왕소군의 무덤에 서 있는 왕소군의 동상. 메디치 제공 |
그러나 이 시기의 흉노는 서역으로 시선을 돌려 26개 왕국을 복속시켰다. 한 고조 6년에는 한신을 투항시키고 만리장성을 넘어 진양을 점령했다. 이듬해 유방은 보병 32만명을 이끌고 흉노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흉노의 왕 묵돌은 40만 기병으로 이들을 포위했다. 유방은 황실의 여인을 흉노로 보내 외교적 관계를 형성했는데 훗날 ‘화친(和親)정책’의 시초였다.
저자는 오늘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혔던 백흉노와 북방을 통일한 저, 중원의 왕조를 위협했던 토번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어 세계의 제국을 만든 몽골이 등장한다. 초원의 주인이 된 테무친은 몽골을 9만5000호로 나누어 귀족과 공신들에게 나눠 줬다. 직접 통제한 1만명의 친위대는 신임하던 4명의 장군에게 줬다. 몽골은 빠른 속도로 세계제국을 만들었고, 이들의 기병 앞에 중국의 중원과 유럽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저자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집약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중국은 역사에 있어서 지리적 영역 안의 모든 왕조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 역시 이러한 궤를 따르는 모양새다.
이에 책을 옮긴 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저자의 역사적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그는 150쪽에 걸쳐 티베트와 위구르 등 일부 지역의 역사서술에서는 오류가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