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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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 아픔 씻김굿으로 훌훌… 미래로 나아가야”

무속에서 ‘역사 화해’ 모델 찾는 박찬경 작가 / 식민·전쟁·분단·독재·민주화 과정… / 산수풍경 속 인물들 통해 메시지 전달 / “굿판이야말로 강한 연대감 잘 보여줘” / 친형 박찬욱 감독과 공동 영화작업도
동학농민운동,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한국전쟁, 개발독재,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 어느 시기보다 집약된 상처들을 지니고 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난 시기를 보듬고 뒤돌아볼 때가 됐다. ‘역사의 씻김굿’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박찬경(52·사진)의 영상작품 ‘시민의 숲’은 이를 형상화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자면 성찰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화해와 상상력의 모델을 씻김굿으로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는 박찬경 작가. 그는 “역사의 안녕을 보장해 주는 것은 역사와 세계에 대한 외경심”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은 영상작업 ‘시민의 숲’
영상은 한 폭의 전통산수화를 보는 듯 흐른다. 긴 두루마리 그림이 펼쳐지고 있는 느낌이다. 작가도 그렇게 영상설계를 했다고 한다.

산수풍경 속에 인물들이 곳곳에서 영가처럼 등장한다. 그중엔 일제강점기 고깔모자를 쓴 피의자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일제에 항거하다 처형된 선조들의 모습일 것이다. 종소리와 진도상여소리 등이 배경음악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장엄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영가를 천도하는 제주할망소리는 팽목항을 떠올려준다. 

명두 오브제 작품.
스피커만 20여개가 설치된 엠비소닉 입체음향은 관객이 실제상황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오디오마저 줌인, 줌아웃을 통해 관객의 위치에 따라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작가가 굳이 비디오 작품이 아니라 비디오-오디오 작품이라 고집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우리는 근대화라는 명분 속에 많은 것들을 소수자로 내몰아 배척했습니다. 전통이 그랬고, 민초들이 그랬습니다. 무속의 정신적 자산도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는 무속의 꽃인 굿에서 ‘역사 화해’의 모델을 본다. 굿의 정신이 가장 잘 나타나는 지점을 ‘뒷전’으로 생각하고 있다.

“3박4일 굿판의 마지막은 파경으로 장식하게 됩니다. 그간 굿에 등장하지 않았던 잡귀까지 불러 먹여 보내야 굿판이 끝나게 됩니다. 바로 민중의 연대감, 연민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사회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민중관보다 훌륭합니다.”

그는 역사를 뒤돌아보고 화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의 상상력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방법론의 모델로 역시 무속의 명두(明斗)를 제시한다. 중요한 무속 도구로 무당과 신령의 교감·소통의 매개체다. 놋쇠로 만든 앞면은 거울처럼 반질하고 뒷면에는 해와 달, 북두칠성을 새겨놓는다.

“명두에는 도시적 삶으로 하늘 볼 일이 없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우주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민담, 설화, 무속에는 풍부한 우주적 상상과 이미지들이 존재하지요. 세계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지요.”

그는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야말로 미래 안녕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름답게 만든 명도 오브제작업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7월 2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영상작품과 오브제작업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측면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다양한 작품으로 국내외적 주목을 받는 박찬경은 친형인 영화감독 박찬욱과 함께 영화작업으로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형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0일부터 열리고 있는 ‘하이라이트’ 전에 ‘파킹찬스’라는 이름으로 3D 영상 작품을 출품했다.

박찬경 작가는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