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몽양의 70주기를 맞아 최근 간행된 계간지 ‘역사비평’ 제119호에 여운형이 쓴 1쪽짜리 편지와 4쪽짜리 청원서를 분석한 글을 실었다. 편지와 청원서는 미국 컬럼비아대 버틀러도서관의 크레인 가족문서에 보관돼 있었다.
정 교수는 먼저 편지와 청원서가 작성된 배경을 설명했다. 무명의 교회 전도사였던 여운형은 1918년 11월 27일 상하이 ‘칼튼 카페’에서 열린 크레인 환영 오찬에 참석해 그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크레인이 한 연설의 주된 내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해 피압박 상황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오찬 자리에서 크레인과 대면한 여운형은 상하이에 체류하고 있던 장덕수(1894∼1947)를 만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와 청원서를 완성했다. 여운형은 편지에서 영어로 “우리는 끔찍한 억압적 통치 아래 놓여왔지만, 세계에는 거의 잊혔고 주목받지 못했다”면서 “동봉된 문서(청원서)에 묘사된 것처럼 이러한 상황을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고 적었다.
여운형은 크레인에게 청원서와 편지를 보낸 뒤 그해 12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밀러드에게도 파리강화회의에 전해 달라며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다. 정 교수는 “몽양이 밀러드에게 전한 청원서는 요코하마에서 일본 경찰에게 빼앗겼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크레인과 밀러드는 여운형의 청원서를 들고 각자 미국으로 들어갔지만,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여운형이 쓴 청원서의 내용을 미국과 윌슨 대통령의 공로에 대한 찬사와 기대, 일본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확장 정책을 펴는 데 대한 경고, 일본 점령하의 한국 상황을 정신적·정치적 측면에서 설명, 한국인의 독립투쟁 의지 피력과 미국의 지원 요청 등으로 요약한 뒤 “이러한 논리와 논법은 3·1 운동 시기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보편적으로 제기되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운형의 시도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라는 해외 독립운동의 자극과 그 연장 선상에 놓인 도쿄 2·8 독립선언은 3·1 운동이라는 국내적 대폭발을 이끌어냈다”며 “해외와 국내가 영향을 주고받은 이런 메아리 효과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한국 독립운동 사상 일대 성취를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사진=역사비평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