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과 기독교 본연의 길을 추구했던 여해(如海) 강원용 목사(1917∼2006·사진)의 말이다. 지난 2004년 6월 21일 저녁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수련회가 열린 자리에서 대담 도중 했던 말이다. 그가 소천하기 2년 전의 공개 행사였다. 생전에 그는 사람다운 사람을 위한 기독교로 거듭날 것을 촉구한 참종교인으로 추앙받았다. 최근 강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해 그의 삶과 사상을 되새기는 행사들이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의 거목인 강 목사는 경동교회 설립자다. 1917년 10월 30일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출생한 강 목사는 1935년 만주 북간도 용정중학으로 진학해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등과 교우했다. 이후 은진중학에서 김재준 목사를 만나 개신교 신앙에 눈을 뜨면서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한다. 광복과 분단 시절에는 민족의 선각자로서, 혁명과 독재정권의 격변기에선 소외된 자를 위해 살아간 인물이었다.
당시 대담에서 기독 신앙자의 본분을 지적한 강 목사의 지침은 해가 갈수록 울림이 커지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욕심, 그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것을 하나도 없이 비웠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가지만은 분명해야 한다. 자기중심의 욕심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적어도 그 노력을 안 하면 신자라고 안 본다. 신도 숫자가 얼마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강원용 목사가 지난 2004년 6월 21일 한국기독교목회자 수련회 도중 옥한흠 목사와 대담하고 있다. |
“여운형은 열린 인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눈박이가 되어 사람과 세상을 보았다. 빨갱이의 눈 아니면 극우파의 눈으로밖에는 보지 못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화합을 모색하려면 다른 점은 다르게 보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눈과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여운형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외눈박이 소인배들이 어지럽게 설쳐대는 그 시대에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좌익 외눈박이들도 그를 껄끄러워했고, 우익 외눈박이들도 불편해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하고 세계 속의 한국이 될 경우 과거 인물 속에서 지도자 모델을 굳이 찾으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여운형이 그 모델감이다’고 말할 것이다.”
강 목사의 삶은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쳐온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의 산증인으로 추앙받는다. 일제 시절, 광복 후, 6·25전쟁, 1970∼80년대 격변기를 온몸으로 거쳐온 강 목사의 체험은 이 시대에 등불이기 때문이다. 여해상 운영위원회는 “여해상은 강 목사가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던 인간화와 평화의 가치를 위해 노력해온 인물이나 기관에 수여하는 상”이라며 “제1회 여해상 본상 수상자로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등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운영위원회는 “몽양 여운형은 좌와 우의 갈등을 넘어 민족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며 “몽양의 사상을 계승·발전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를 제1회 여해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여해와함께 관계자는 “이번 문화제는 강 목사가 남긴 인간화·대화·평화의 메시지와 유산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점검하고 평가하며 미래 세대와 어떻게 공명할 것인지 가늠해볼 소중한 기회”라고 설명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