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요? 요즘 서명 칸만 들어 있는 백지 계약서도 못 받는데, 요구하면 X라이 소리 들어요." 7년째 일러스트 작가로 일해온 A(42)씨는 업체에 계약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2016년 예술인복지법 개정되면서 서면계약이 의무화했지만 업계 ‘관행’은 그대로다. 그는 “미팅 때 계약서 요구하면 ‘다음에 같이 하자’고 말하는데 어떻게 계약서를 요구하느냐”고 반문했다.
12일 서울 종로구 서울연극센터에서 문화예술 불공정 관행 개선을 위해 열린 ‘문화예술 청책(聽策) 토론회’에서 강신하 변호사가 ‘문화예술분야불공정 실태와 제도적 개선방향’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
계약서를 쓰지 못해 업체의 부당한 지시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초 한 유명 학습지 출판사와 작업했던 A씨는 완성된 그림을 넘긴 뒤 2주 만에 100번이 넘는 수정 요구를 받아야 했다. “칙칙하다”, “느낌이 별로다” 등의 주관적이고 모호한 수정 지시가 계속 이어졌다. 스트레스성 장염까지 걸린 A씨는 “고료를 포기하겠다”며 일을 포기하고 나서야 수정 요청 전화를 받지 않게 됐다. 그는 “지금 일러스트 고료가 20년 전의 절반밖에 안 된다”며 “출판사와 일부 유명 작가들과 달리 이름 없는 작가의 작업 환경은 더 열악해졌다”고 한탄했다.
서울시가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A씨를 비롯한 만화(웹툰)·일러스트 작가들이 겪는 불공정 관행을 실태조사한 결과를 ‘문화예술 청책(聽策) 토론회’에서 12일 발표했다. 작가들은 2차 저작권 사용 권리를 모두 회사에 넘기는 매절계약과 부당한 수익배분, 일방적인 계약해지, 욕설·성추행 등의 인권침해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었다.
총 834명의 예술인이 지난해 12월부터 석달가량 진행된 실태조사에 응답했다. 웹툰작가 315명과 일러스트 작가 519명이 온·오프라인으로 설문에 참가했다. 조사는 근무형태 등의 기본 현황과 계약체결 여부, 불공정 경험 여부, 인권침해 경험 여부 등 4개 항목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불공정한 계약조건 강요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만화(웹툰)작가 중 36.5%와 일러스트 작가 중 79%가 불공정한 계약조건을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만화(웹툰)작가들은 2차 저작물 매절계약(31.4%), 부당한 수익배분(31.4%)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연양갱(필명) 웹툰 작가는 “업체에서 월 200만원의 고료를 주면서 2차 판권 우선 협상권, 해외 판권 등의 권리를 가져간다”며 “신인 작가들은 계약서를 구경조차 못하거나 내용도 모른채 사인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부당한 계약해지와 수익분배로 어려움도 만연했다. 업체의 일방적인 통보와 폐업 등의 이유로 웹툰작가 중 35.9%, 일러스트 작가의 54.9%가 부당한 계약해지를 당했다. 일러스트 작가 중 고료 지급이 지연되거나 거부당하는 등의 부당한 수익 배분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78.2%로 만화(웹툰) 작가보다 2배 가량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2016년 만든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만화(웹툰) 업계와 달리 일러스트 업계는 표준계약서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구두계약을 경험한 비율은 일러스트 작가 중 51.1%에 달했지만 만화(웹툰) 작가는 15%에 불과했다.
불공정한 계약과 열악한 처우는 인권침해로도 이어졌다. 웹툰작가 중 30.8%, 일러스트 작가의 36%가 욕설과 인권무시, 성추행·성희롱 등의 인권침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만화(웹툰) 작가 중 9.5%, 일러스트 작가 중 10.6%가 성추행·성희롱 등을 당했다.
시는 실태조사와 더불어 2차적 저작물 모두를 양도하는 매절계약과 작가에게 불리한 연재조건·계약해지 절차 등을 담은 불공정 계약서에 관한 법률 검토도 마쳤다. 한 교과서 출판 업체는 계약서에 “‘을’은 저작인격권(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유지권)을 주장하지 않으며, ‘갑’은 다른 영리 또는 기타의 목적을 위해 작업물을 사용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해당 계약서를 살펴본 강신하 변호사는 “저작권법 제45조 2항에 위배 된다”며 “예측 불가능한 장래수익이 발생해 작가와 업체 사이에 수익불균형이 발생한다면 이를 시정할 수 있는 계약 변경권 등의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실태조사를 마친 시는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불공정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예술인 복지법’ 개정 건의 등을 준비중이다.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에서만 갖고 문화예술용역거래에 대한 실태조사권, 시정명령권을 지방자치단체장에게도 위임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다음달 부터는 문화예술 불공정 피해 사례를 수집하고 교육, 홍보를 담당하는 ‘문화예술 호민관’을 관련 협회와 단체에 파견한다.
서동록 서울시 경제진흥본부장은 “법 위반이 의심되는 사례는 공정거래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에 조사를 의뢰할 것”이라며 “관련 법률 개정과 상시적인 모니터링으로 문화예술 분야의 불공정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