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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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 고시생 책 54권 훔친 장수생 쇠고랑

올해 3월10일 오전 11시4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의 한 독서실. A(33)씨는 이 독서실에 태연히 들어가 행정고시 준비 서적 6권을 가방에 쓸어 담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책 6권이 한꺼번에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B씨는 경악했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책들인데다 시가로 18만원어치이기 때문.

A씨가 독서실에서 고시 준비생들의 책을 슬쩍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고시생들이 공부하다가 두꺼워서 무거운 책은 책상에 두고 다니고, 낮 시간대 출입자가 많아 문을 열어 놓는 독서실이 있는 점을 노렸다. 이런 수법으로 지난 1∼5월 신림동 독서실 8곳에 17차례 침입해 고시 서적만 54권을 훔쳤다. 대부분 행정고시 관련 책이고, 가장 비싼 책의 가격은 6만원에 달했다.

그런 A씨 역시 고시 장수생이다. 신림동에 터를 잡고 2007년부터 8년간 행정고시 준비에 매진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에서 더 이상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아 찜질방, 피시방 등을 전전하게 되면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훔친 책들을 한 권당 1만∼2만원을 받고 이모(48)씨 등 중고 서점 업자 4명에게 팔았다. 또 독서실 앞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잠든 C씨의 지갑과 휴대전화를 훔쳐 휴대전화는 16만원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장물을 팔아 마련한 120만원 정도를 생활비 등에 썼다.

경찰은 B씨 신고를 받고 독서실 주변 폐쇄회로(CC)TV 120여개를 분석해 수사에 착수했다. A씨는 결국 지난달 23일 관악구의 한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20일 18차례에 걸쳐 422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절도·건조물 침입)로 A씨를 구속했다. 그가 훔친 책과 휴대전화를 사들인 혐의(장물 취득)로 중고 서점·휴대전화 판매 업자 5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자포자기한 것 같더라”며 “자신과 같은 처지인 고시생들의 책을 훔친 데 대해 자책하고 반성도 했다”고 말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