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정원을 만드는 최고의 드림팀이 있었다. 바로 면앙 송순(1493∼1583)과 하서 김인후(1510∼1560), 소쇄옹 양산보(1503∼1557)이다. 송순은 면앙정을 조성하고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김인후는 인종의 스승으로 당대 성리학의 대가이고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다. 이들은 학문적 교우이면서 친인척 관계로 조선 중기 대표적 정원인 소쇄원(명승 제40호) 조성에 드림팀으로 참여했다.
각자의 역할을 보면 송순은 정원 공사자금을 댄 투자자이자 자문 역할을 했다. 양산보는 정원 설계와 시공을 맡았고, 김인후는 활용 프로그램 전문가였다. 송순은 관찰사로 있을 때 소쇄원 증축에 소요되는 재물을 지원했는데, 나중에 그가 면앙정을 지을 때 양산보가 돕기도 했다. 양산보는 고경명의 시에 보면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고 매화나무를 직접 심는 등 조성에 직접 참여한 정원가였다. 20대에 초정인 소쇄정을 시작으로 40대에 지금의 정원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김인후는 성리학적 소양과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 ‘소쇄원 48영시’를 짓고 ‘소쇄원도’(사진)를 탄생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목판본은 당시 정원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록화이면서도 각 정원 공간에서의 행위와 함께 오감을 통해 집약된 상징성을 담고 있다. 소쇄원도는 당시 문인화의 산물로 유행한 산거도, 별서도, 제택도 같은 그림과도 차별된다. 특히 소쇄원은 산수화의 전체 구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저 바라만 보는 정원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 속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정원, 즉 시경의 경지를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김인후는 정원시를 통해 소쇄원에 꽃과 나무, 바위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직접 담당했다. 호남 가사문학의 산실이기도 한 담양에서 활동한 당대 최고의 걸출한 인물 3명은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시대 전통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