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한국사의 안뜰] 구한말, 러시아는 조선을 애틋하게 보았다

<48> 사료로 본 러시아의 시선
얼마 전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 일본대사가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흔히 외교관이라 하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외교관 출신인 무토 전 대사가 이처럼 자극적인 제목을 골랐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토 전 대사는 누구보다 한국을 잘 아는 외교관이기에 반전의 재미와 반성의 기회를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언론에 소개된 일부 내용을 보니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균형 잡힌 비판의식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고, 일본 출판사의 상술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이 책이 기록물로 남게 될 경우, 후세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 마련이다. 비록 그 시선이 불편하더라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타국의 시선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문제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다른 나라의 외교문서나, 한국을 경험한 외국인의 글을 발굴한다. 


1900년대 초기 러시아 총영사관과 병사(兵舍) 전경을 찍은 흑백 필름. 1906∼1907년 한국을 찾은 독일 장교 헤르만 산더가 일본인 사진작가 나가노를 고용해 촬영한 사진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19세기 극동지역은 세계 강대국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곳이었다. 동시에 상대 국가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선이었다.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던 외국인들은 한반도로 들어왔다. 비단 외교관과 군함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학자들로 구성된 탐험가가 오기도 했다. 이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당대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 역시 우리의 주요 외교 대상 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그 비중은 미국이나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러시아를 단지 유럽의 한 국가로만 간주하면서, 현안 과제 해결에 러시아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9세기 한국을 방문한 러시아 사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앞으로 한·러 관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크렘린궁.
러시아는 1860년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면서 조선과 국경을 맞대기 시작했다. 러시아에게 극동지역은 부동항 확보를 위해 중요한 전략적 위치였다. 그러나 불모지였던 연해주는 식량과 병참 확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는 이 연해주를 개발하는 데서 시작된다.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은 뛰어난 노동력과 적응력을 보였는데, 이는 러시아 기록 곳곳에 남아 있다.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은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외교관계를 시작했다.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중국과 일본처럼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러시아가 극동지역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연해주의 빈약한 기반시설이었다. 연해주가 기본적인 식량 보급 기지의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면서, 큰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영국과의 마찰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미 페르시아와 인도 등의 지역에서 충돌을 빚었던 러시아가 한반도에서까지 행동을 벌이기에는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했다. 


조선의 경복궁.
결국 러시아는 동진정책을 펼쳤지만 소극적인 동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을 둘러싼 정세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현상 유지가 러시아의 최고 목표였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을 대하는 러시아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이다.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제국들의 위협으로부터 방패막이 역할을 한 것으로도 평가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정변이 궁궐에서 일어날지 몰라 외국 대표들이 번갈아 궁에 기거하던 중 러시아의 건축가인 세레딘 사바틴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동시에 쇠약한 조선의 국력을 일으키기 위해 러시아에 자문한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황제와 상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군대 개혁을 위해 러시아 교관까지 불러들인다.

분명 고종의 선택은 탁월했다. 후일을 도모하고자 현상 유지를 내심 바란 러시아는 조선이 바라고 있는 최적의 동맹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간교한 술책에 점점 힘을 잃고, 1904년 노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멀어지게 된다. 


수묵과 채색으로 함경도와 러시아 동부지역을 그린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 김광훈과 신선욱이 고종의 지시를 받고 연해주 일대를 16년간 정탐해 제작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고종은 3000여명의 군사를 훈련하기 위해 러시아 군사 교관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숫자의 군사들만으로도 조선의 독립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의 재정 전문가 포코틸로프는 외교문서에서 ‘러시아에서 장교들이 서울로 와서 직접 군대를 가르치게 된다면 지방 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갖은 핑계를 대며 세금과 조공을 바치지 않아왔던 지방 관료들에게 훈련된 병사를 언제든 파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금 징수 등에 더 도움이 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관리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였다.

노일전쟁 직전 고종은 중립 노선을 지킬 것인지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고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본국에 외교문서를 보낸다. ‘현재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제국은 중립 정책을 포기할 것이며, 공개적으로 러시아와 동맹국임을 선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계략으로 조선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활용되기까지 한다.


이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던 1908년 고종은 다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운다. 더 나아가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만류한다. 당시 러시아는 국내외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어 그만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줄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러시아를 ‘아라사’로 부르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관계를 많이 맺고 있던 조선 북부 지역은 러시아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러시아 공사관의 무관 스트렐비츠키는 ‘또 다른 강력한 동맹자가 있습니다. 바로 조선의 수많은 농민들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강력한 이웃이자 보호자인 우리에게 진실되고 확실한 호감을 곳곳에서 변함 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을 열린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또 있다. 조선을 여행한 가린 미하일롭스키는 ‘조선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아른거렸지만 이들은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침에 약탈이 벌어졌어도 바로 숲에서 나와 마치 아침이 온 것처럼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죽은 사람 옆에 모여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중략) 이 온화한 민족의 장점들을 세고 있자니 피곤해질 지경이다. 이 사람들과 지내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본 조선은 더러운 시궁창과 쓰러져 가는 가옥들, 심지어 보수도 제대로 안 된 잡초투성이 궁궐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조선의 아픔을 공유하고 밝은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조선을 탐험한 러시아의 루벤초프는 ‘조선은 잠재적인 에너지가 충만한 나라로,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기로에 있다. 이 조선에는 앞으로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아마 머지않아 이 나라는 보잘것없고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나 태평양 연안국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지역이 될 것이다.’

이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