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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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백야 김좌진 장군과 순국지 中 하이린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은 후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매년 대학생들은 장군을 기리는 ‘청산리 역사대장정’을 떠나고, 고향인 홍성에서는 ‘김좌진장군배 철인3종대회’가 열린다.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에 있는 ‘김좌진 장군 순국지’에도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래 이곳은 장군이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설치한 금성정미소가 있던 자리다.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에 있는 김좌진(작은사진) 장군 순국지.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장군이 정미소를 설치한 곳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장군은 구한말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나이에 국권회복을 위해서 빈부귀천을 철폐하고 인간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했고, 먼저 노비를 석방했다. 1907년 부인 오숙근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상경을 전후하여 나라를 잃은 분한 마음에 김항규·김홍진 등과 함께 자진해서 상투를 잘랐다.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한 후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지원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며 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1년 1월 일경에 붙잡혔다.

1913년 형기를 마치고 고향인 홍성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15년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다시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대한광복회 부사령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만주로 떠난 장군은 1919년 3월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표로 서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 10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홍범도 부대와 함께 러시아 이만으로 이동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1925년 3월 닝안현에서 북만지역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조직된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27년 12월 신민부가 교육과 산업에 치중하자는 민정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군정파로 나뉘게 되자 중앙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정파를 이끌었다. 이후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류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