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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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칼럼] 책 읽는 대통령

인터넷에 밀려난 책 고사 위기
계속 방치 땐 지식 생태계 위험
책 읽는 대통령 보여주기보다
더 효과적인 독서 캠페인 없어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무엇일까. 한 초등학생이 얼굴이 못생겼으니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좋겠다는 편지를 받고 기르기 시작했다는 그 텁수룩한 턱수염일까. 미국을 내란으로 몰고 가면서까지 흑인 노예를 해방한 역사적 사건일까. 남북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63년 11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했던 그 유명한 연설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남북전쟁이 끝난 지 닷새 뒤 포드 극장에서 남부 지지자인 존 윌크스 부스 일당에게 암살당한 비극적 사건일까.

그러나 내게는 링컨하면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1864년 매슈 브래디가 찍은 링컨의 사진 한 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의자에 앉은 링컨 대통령이 막내아들 토머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는 흑백사진 말이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독서 캠페인 홍보 사진으로 자주 사용돼 왔다. 실제로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책을 좋아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 문학비평가
링컨은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가난한 소작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책을 사줄 형편이 못됐다. 그래서 링컨은 책을 빌려 읽을 수밖에 없었고, 책을 빌리기 위해 몇 십리씩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한 친구에게 사방 800리 안에 있는 책은 모조리 읽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을 정도다.

유년시절 링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파슨 윔스가 쓴 ‘워싱턴 전기’였다. 이웃집 아저씨에게 빌린 이 책을 읽으며 그는 애국심과 독립심을 일깨웠다. 링컨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고 한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설에서 청중에게 “책을 잡아 보십시오. 그러면 더 훌륭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승전 축하 연설 자리에서조차 그는 이렇게 책 타령을 한 것이 여간 놀랍지 않다.

책을 좋아하는 미국 대통령은 비단 링컨만이 아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무식하다고 정평이 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은퇴하고 고향 텍사스에 내려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철물점에 들른 일과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구입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대통령의 모습은 언제나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다. 최근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국민들이 책을 멀리하자 정부 차원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독서 캠페인을 벌여 왔다. 그러나 대통령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독서 캠페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책 읽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국민은 자연스럽게 손에 책을 들게 될 것이다.

요즘 출판계는 책이 팔리지 않아 몇 년째 깊은 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 하루에도 문을 닫는 출판사가 속출한다.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빠져 좀처럼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한 번 타 보라. 앞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 일곱 명 중 여섯 명은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고, 한 명은 졸고 있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을 무슨 주문(呪文)처럼 자주 입에 올리는 오늘날의 슬픈 자화상이다. 상상력과 창의성, 비판적 사고 없이 4차 산업혁명은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력과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는 활자매체를 통한 독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멸종위기 생물처럼 이제 책 읽는 것도 보호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생물종이 사라지면 생태계가 위협받듯이 책을 읽지 않는 일이 지속되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지식 생태계가 위협받는다. 지식이나 문화 기반 자체가 무너져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들린다.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대로 책이 사라지면 인터넷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다시 중세의 암흑기로 돌아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 문학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