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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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여행의 두 얼굴

휴가 후유증 경험 비율 71%
여행보다 ‘휴식’ 희망자 1위
여행의 축복은 집과의 결별
감당할수 있는 자만이 떠나라
여행에 관한 가장 김빠지는 정의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행위’라는 것일 듯하다. 가출이나 출가가 아닌 까닭에 집으로의 귀환을 전제로 해야 그 의의가 분명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행 이전보다 여행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집이 안락해서가 아니라 집에서의 일상은 유지돼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의 완성은 여행의 소멸이라는 말도 한다. 여행을 떠나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요즘 한창 절정에 달하고 있는 휴가철을 맞아 실시한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휴가를 다녀온 후 일상으로의 복귀가 더 힘들다는 ‘휴가 후유증’을 경험한 비율이 70.9%에 달했고, 그 여파인지 이번 휴가에는 여행을 가기보다는 그냥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대답이 1위를 차지했단다. 호텔과 바캉스를 합친 신조어인 ‘호캉스’보다 더 과격화된 형태로 새롭게 등장한 ‘감금 휴가’를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방전이 아닌 충전을 위해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유폐시키기를 선택하게 할 만큼 피로감에 빠진 여행의 역습이 슬슬 시작된 것일까.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최근 출간된 백가흠의 여행소설집 ‘그리스는 달랐다’는 책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그리고 “멀리 떠나면 모든 것이 확연히 보이곤 했다”라는 소설 속 문장에 녹아있듯이 “그곳엔 있고 그곳엔 없는” 것들에 주목한다. 그곳은 그리스이고, 이곳은 한국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스에서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은 ‘그리스는 다르지 않았다’로 책 제목을 변경하고 싶게 만든다. 어쩌면 이곳으로 돌아올 때가 됐기에 그곳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지친 몸과 이국의 문화에 익숙해질 무렵 여행은 끝이 난다.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여행의 끝을 알려준다.”

사실 여행소설의 고전에 해당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도 의외로 무진으로 떠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울로 돌아오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 1960년대 소설이다. 주인공 ‘나’의 여행 목적지이자 고향은 무진이지만, 여행의 출발점 혹은 원점은 서울이다. 더욱이 무진은 따뜻하고 포근한 원초적 고향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천박한 서울을 닮은 ‘또 다른 서울’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에게 더 이상 고향은 없고, 어디를 가든 서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서울로 돌아와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대가로 얻게 된 큰 제약회사의 전무 자리에 취임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은 “무진 Mujin 10km”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이다.

그리스든 무진이든 그곳이 어디라도 집 떠나면 고생이니 집에서 편히 쉬는 게 남는 장사라는 구태의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사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니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장소가 아니라는 유심론적 여행을 추천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행이 여행인 것은 그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집이 집에 불과한 것처럼. 더군다나 떠나지 않으면 돌아올 수도 없다. 여행의 축복은 집과의 결별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주는 데에 있다. 여의치 않으면 집을 등에 이고서라도 떠나야 할 정도로.

하지만 여행도 스스로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여행을 거부할 만큼 비대해진 여행에 대한 지나친 환상 때문이다. 여행은 원래 힘들다. 대부분 풍경이 아닌 사람 때문에 더 힘들지만. 그런데도 여행 고수들은 준비 없이 떠났다가도 준비된 사람이 돼 돌아온다. 혼자 떠났다가도 새로운 자신 혹은 의외의 동반자와 함께 돌아온다. 그러니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여행을 떠나라. 침대 속으로도 좋고, 책 속으로도 좋다. 내면의 감옥 속이라도 상관없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비난은 그런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의 닻이자 돛이다. “당신은 가망 없는 펜대 운전사올시다.” 그래도 반성하지 않는 배짱은 필수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