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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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어야 '산다'] 자살은 나랏님도 못 막는다?

韓자살률, OECD서 유일하게 20명대 / “거시 경제담론과 직접 연관 어려워” / 전문가들 “막을 수 있는 자살은 막자” / 국가차원 예방 성과 거둔 국가 다수 / “정부·민간 협력가능 국가전략 필요”
‘삶의 질이 올라간다면 딱히 정책 없이도 내려갈거 같은데.. 삶의 질이 높으면 자살할 이유도 없음’(pjhk****)

‘자살을 어떻게 막나? 자살 방지 예산은 살고싶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쓸데없는 예산 낭비하지 말길’(닉네임 모래)

‘먹고 살기 좋고 차별 안받고 학교생활 좋아지면 줄어드는 일’(silv****)

‘더불어 잘사는 사회가 만들어지면 자살율도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ai****)

자살예방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으레 달려 있는 네티즌들의 댓글들이다. 요컨대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인데 국가에서 어떻게 막느냐는 것이다. 자살은 ‘어쩔 수 없는 것’, ‘잘 살게 되면 나아지는 것’이란 대중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 부처를 비롯해 우리사회 각계에서 바라보는 자살예방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살을 경제적인 문제와 연관시키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실업률이 개선되면, 소득분배가 공정해지면, 복지가 확대되면 자살률은 자연스레 낮아질까. 전문가들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설명한다. 경제 상황이나 복지 여건만으론 늘어나는 자살자 수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부도’ 몰렸던 그리스, 자살률은 최하위권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10만명 당 자살자 수(자살사망률)가 2.6명으로 가장 낮은 터키의 경우 1인당 GDP가 9826달러로 우리나라(2만9115달러)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더구나 터키는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뜻하는 지니계수 개선율이 5.9%로 우리나라(11.4%)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국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자살률(28.7명)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상위 10개국(OECD Health Data 2017)
그리스는 ‘IMF사태’를 겪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국가부도에 이를 수 있었던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이한 그리스의 24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2013년 한때 64.2%에 달했을 정도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그리스의 1인당 GDP는 1만7806달러로 우리보다 낮지만, 자살률은 4.7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보다 6배가량 낮은 수치다.

이밖에 1인당 GDP가 7993달러인 멕시코(5.5명), 1만6412달러인 슬로바키아(9.7명), 1만3663달러의 칠레(10.4명) 등을 보더라도 거시적인 경제상황과 자살률을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전문가들이 “경제적인 문제가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직접요인으로 보기 여렵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가난과 우울증, 질환 등 이유로 자살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난하거나 아프다고 해서, 우울증이 있다고 모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자살 사고’(suicidal ideation)가 있는 사람이 ‘방아쇠’ 역할을 하는 주변 요소들을 접했을 때 비로소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유해한 환경적 요소만 제거해주면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자살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유해정보 차단, 자살시도자의 사후관리, 자살 고위험군 모니터링 및 복지시스템 연계 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경희대 백종우 교수(정신건강의학)는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자살을 막을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막을 수 있는 자살’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건 사실”이라며 “자살을 나약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자살예방 사업을 가로막고 있다. 많은 선진국이 그랬듯 자살문제도 관심을 갖고 투자를 늘리면 분명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살예방, 전 분야 걸친 종합대책 필요”

핀란드는 자살의 이러한 특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국가다. 핀란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된 1965∼90년 자살률이 3배나 폭증했다. 자살률이 가장 높았던 1990년 10만명당 자살률은 지금의 우리보다 높은 30.2명이었다.

자살률이 높아지자 핀란드 정부는 1986년 자살예방 대책을 수립하고 이후 6년간 전문인력 수백명이 참여해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는 ‘심리적 부검’에 나섰다. 이를 토대로 자살 원인을 유형별로 분류한 뒤 정신질환 조기 치료 등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적용했고, 이후 자살률을 2000년(22.1명), 2010년(17.3명), 2014년(14.1명)으로 절반가량 낮췄다.

일본 동북 지방에 위치한 아키타현도 정부의 개입으로 자살률을 낮춘 대표적인 사례다. 과거 일본에서 ‘19년 연속’ 자살률 1위를 기록한 아키타현은 1998년 정부와 민간단체 등 각계가 협력한 자살예방대책 시행 이후 자살자 수가 41.4%나 감소했다. 지방 정부가 만든 로드맵을 바탕으로 민간단체, 지역 언론이 협업해 ‘자살예방 핫라인’을 구축했고, 자살시도자 치료 및 복지지원을 대폭 늘릴 수 있었다.

중앙자살예방센터 한 관계자는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자살자 수가 늘어나는 ‘위험신호’가 나타나면 정부 차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처해 자살을 막으려 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십수년 연속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컨트롤타워가 없는 탓에 각 부처가 유기적으로 연계해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컨트롤타워’는커녕 자살예방 관련 단체들이 만성적인 예산 부족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자살예방의 ‘최전선’이라고 평가되는 상담사업만 보더라도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의 경우 한 달에 관련 상담전화만 3000∼4500건에 달하지만 2∼3명씩 돌아가며 12시간씩 근무하는 게 전부다. 이들 상담요원이 현장 출동까지 담당하는데,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는 상담 인력이 한 명뿐인 등 열악하기 그지 없다. 또 현장에서 자살시도자들의 과격한 폭력,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관련법 미비로 경찰 등의 조력도 기대할 수 없어 홀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일쑤다.

한국자살예방협회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제자리 걸음’만 하는 동안 자살률 2위 국가와의 차이가 9명까지 벌어졌다. 현재 우리나라만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자살률이 20명대”라며 “국가에서 막을 수 있는 자살이 분명하게 있는 만큼 정부가 그 심각성을 깨닫고 각계가 협력해 대처할 수 있는 국가전략을 마련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