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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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벌레들의 세상에서

‘맘충’이라는 단어엔 우리 사회… 약자 대한 부끄러운 속내 담겨 / 아줌마·아저씨들은 껄끄럽고, 젊은 아기 엄마는 만만한 대상
비 그친 오후, 매미소리 요란한 산책길에서 포충망 든 아이를 만났다. 나무 둥지에 앉은 매미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는 아이, 포충망이 닿기 직전 매미는 ‘쌔에’ 소리를 내며 달아난다. 설마 요즘도 곤충채집, 식물채집, 이런 방학과제를 내주나. 채집 가능한 벌레가 있기는 할까.

사실 벌레 찾기는 숲이 아닌 일상에서 더 용이할지도 모른다. 잠깐 인터넷을 살펴도 맘충, 한남충, 알바충, 고시충, 지방충까지 갖가지 벌레가 호명된다. 당연히 비난과 혐오의 언어가 동원되며 그 대상은 약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용어인 맘충, 엄마(mom)와 벌레(蟲)의 합성어로 애초에는 자기 자식만 아는 안하무인의 아기 엄마를 이르는 말이었겠으나 최근에는 공공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엄마, 심지어 아이 돌보기를 힘들어하는 엄마를 통칭하는 용어로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서하진 경희대 교수·소설가
가령 이런 것이다. 밤새 아이와 씨름하다 잠시 아기를 데리고 카페에서 쉬노라면 남편 잘 만나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는 맘충이 된다. 음식의 간을 좀 싱겁게 해달라 하는 아저씨는 아무 죄가 없지만 아기 먹이려고 하니 간을 약하게 해달라 부탁하는 엄마는 맘충이고, 식은 찌개 데워 달라는 아줌마에게는 상냥하지만 갖은 음식을 주문한 아이 엄마가 아기 이유식 좀 데워줄 수 있겠는지 극히 조심스럽고도 비굴하게 부탁해도 맘충이 되는 걸 피할 수 없다.

아기 돌보기가 힘들다, 한마디 할라치면 아기 낳고 예뻐하지 않는 네가 엄마냐, 모성애도 없냐, 군대도 안 가는데 그 정도도 못하냐, 너야말로 맘충이라는 원색적이고 비논리적인 댓글이 줄을 잇는다. 거기에 뭐라 항변하는 글을 올리면 그 즉시 ‘너 메갈이구나’ 하는 어이없는 답변이 달린다. 그러니까 맘충이 되지 않으려면 혼자 조용히 집안에서 충만한 모성으로 행복에 겨워하며 아기를 돌보아야만 한다.

과장일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지금 검색창에 맘충, 단어를 쳐보면 바로 확인되는 사항이다. 맘충이라는 단어에는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부끄러운 속내가 담겨 있다. 아줌마들은 무섭고 아저씨들은 껄끄럽고 여성, 그중에서도 어린 아기를 동반한 젊은 여성은 만만한 대상이다. 웬만하면 죄송하다 하고 웬만하면 도망가니까.

물론 세상에는 몰염치한 아기 엄마가 있다. 식탁에서 기저귀를 갈거나 아기를 앞세워 새치기를 하고 무슨 짓을 하건 아기니까 봐줄 수 있지 않나, 너도 그랬을 걸 하는 표정의 지각없는 엄마도 무수히 있다. 어찌 저리 개념이 없나 싶은 경우가 넘쳐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혹은 잊고 있는 건 아기를 낳은 여자의 고충이다. 40주 동안 몸에 다른 몸을 품고 있는 것이 어떤 일인지 사람들은 모르거나 잊는다. 산통을 겪으며 생명을 밀어내는 것이 대체 어떠한 일인지 모르거나 잊었으며, 변화무쌍한 고집을 피우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울어대는 아기에게 밤새 시달리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런 일을 지나고 겪고 있으면 개념이란 것이 바뀌고 혼돈이 오기도 하여 맑고 투명하며 이성적이고 냉정한 심리를 유지하는 일이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 역시 절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왜 이해해야 하는가, 내 아이도 아닌데, 자기가 원해서 낳은 아이인데,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대단히 어리석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살다 혼자 조용히 죽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다. 초저출산 국가인 대한민국, 누구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지, 1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인 것을.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혹 맘충이 될까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상처를 입지 않은 게 아니다. 낳는 건 알아서 낳되 나를 절대 손톱만큼도 성가시게 하지 마라, 만약 그런다면 너를 당장 벌레로 만들어 주마, 맘충은 그런 뜻이다. 생각만으로도 벌레 씹은 기분이 드는 말이다.

서하진 경희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