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시간을 견뎌온 비장하고 처연한 아름다움

권의철 화백의 '쇠잔의 미학'
오랜 세월을 머금을 것들에선 영험한 것들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시간이라는 아우라가 경건한 마음마저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권의철 화백(72)은 쇠잔한 것들에 대한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다. 문학 뿐 아니라 미술도 역사라는 시간을 만나면서 풍성한 상차림을 만들어 왔다. 덤덤히 시간성을 견뎌온 모습은 비장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게 마련이다. 작가는 석탑과 비석에서 그것을 보았다.

고향이 경북 상주인 권 작가는 어린시절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 인근에 있는 남장사(南長寺)에 지주 놀러 가곤 했다. 어린 눈에는 주변의 석탑과 비석이 신기하게 보였다.

“돌에 새겨진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는 모습에 끌리게 됐어요. 어느순간부터 비석과 석탑에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을 화면에 담아내고 싶어졌어요.”

그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 먹고 14세에 서울로 올라와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서라벌예고와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비석과 석탑을 작품의 소재로 삼기시작했다. 물론 외형적 모습이 아닌 축적된 세월의 겹이었다. 한평생 추상화 적업을 이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 이는 한국 단색화(모노크롬)의 1.5세대 작가로 자리매김 하게 했다.

그의 개인전이 30일까지 서울 당산동 영등포갤러리에서 열린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주최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비석과 석탑, 불상을 소재로 40여년 간 고집스럽게 작업해 온 단색화 ‘히스토리’연작 30여점을 출품했다.

“한때는 그것도 그림이냐며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의 쇠잔함을 담아내야 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세월만큼 헤아릴수 없는 붓질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것이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붓질 끝에 어렴풋한 것이 비로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비석을 탁본한 모습 같기도 하고 먹지를 대상에 들이대고 문질러대면 드러나는 형상 같기도 했다. 고단한 수행적 작업이었다.

비로서 화폭엔 마모된 비석의 글씨들이 색과 형상으로 들어왔다. 칠하고 또 칠해서 얻어낸 결과물들이다. 일일이 세필로 수 만개의 글씨를 일일이 새겨넣고 지우기를 반복했다.화려한 색채를 무한 반복적으로 올리고, 버무렸다.

“저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형태조차도. 그저 수없는 행위로 시간을 얻어낸 것뿐이지요.” 결국 생성에서 소멸로 나아가는 과정의 미학을 그리고 잇는 셈이다. 

편완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