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킴이’, ‘남산 사나이’로 통하는 김구석(64) 경주남산연구소 소장은 “남산은 불교유적의 보고이자 신라인의 영산이며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고 남산의 역사성과 의미를 강조했다. 김 소장은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의 산이자 선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남산을 보호하고 널리 알리고자 1년에 100번 정도 남산을 오른다. 그는 “30년 넘게 남산을 찾았으니 지금까지 어림잡아 3000번 이상은 남산 정상을 밟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이 사무실에서 경주 남산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장영태 기자 |
남산의 웬만한 바위는 불상 아니면 탑이다. 신라인은 불법(佛法)이 다스리는 이상세계인 불국정토를 꿈꾸며 산속 바위에 부처를 새겼다. 그는 “남산 전체가 보물이고 남산 전체가 천년 신라의 역사인 셈”이라고 말했다. 그의 남산 자랑은 헛된 말이 아니다. 2000년 경주 남산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김 소장은 “남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 뿌리내린 유서 깊은 곳이기에 우리가 정성껏 가꾸고 자랑해야 할 곳”이라고 했다. 그가 남산에 미쳐 지금까지 남산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유다.
그는 20년 가까이 공직에 몸을 담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28살이 되던 1981년에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고향이 경주이지만 공무원 출발은 울산군(현 울산시 울주군)에서 산림직 공무원으로 시작했다. 불교신자였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불교문화에 익숙했던 터라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문화유산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주말이면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경주 유적지 곳곳을 누볐다. 1988년 울산군에서 고향인 경주군(현 경주시)으로 옮긴 뒤에는 더욱 남산과 문화유적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남산사랑모임’과 ‘절터찾기모임’ 등을 만들고 활성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며 “당시만 해도 문화재나 유적에 일반인 관심이 적을 때였다”고 말했다.
1993년에는 ‘영원한 신라인’으로 불리는 고(故) 윤경렬 선생과 함께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이란 책자를 출판했다. 이때 김 소장은 사진을 담당했다. 군 복무기간 3년을 포함해 공무원연금을 받을 수 있는 20년 근무기간을 채우자마자 1999년 마흔여섯 살에 명예퇴직했다. IMF 구제금융으로 공무원 인기가 치솟고 실직자가 넘치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과감하게 공직을 버렸다. 남산으로 돌아오려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김 소장은 “1999년 퇴직 직전에 남산연구소를 만들었다”며 “남산의 가치를 알리고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본격화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정식으로 사무실을 갖춰 설립한 것은 이듬해다. 경주남산연구소는 남산안내소를 운영하고 유적답사와 남산달빛기행을 주도한다. 남산과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홍보하는 일도 맡았다. 지금도 일주일에 8회 이상 22시간가량 강의를 하고 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동국대에서 고고미술을 전공했고 학부 과정을 마친 그는 경주 서라벌대 강사만 13년간 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평생교육원에서도 강의했다. 경주시 가족학습관에서도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강의 주제는 모두 경주 문화재 해설과 답사 등에 대한 내용인데, 남산과 경주문화유적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다”고 밝혔다.
그는 매주 삼국유사를 비롯한 신라와 관련한 고서를 한자로 된 원문으로 읽는 정기 학술모임을 이끌고 수시로 유적을 답사한다. 요청이 들어오면 경주 문화유적 안내도 직접 맡는다. 김 소장은 “남산에선 사찰을 세우려고 나무를 베거나 훼손하는 일이 없었고 불상을 새기려고 바위를 깨뜨리지 않았다”며 “자연과 예술을 품은 남산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아름답다’는 가르침을 던지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경주=장영태 기자 3678jy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