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와 덴마크에서 시작된 ‘살충제 달걀’ 파동이 유럽을 넘어 한국과 홍콩 등 아시아 지역까지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가 진정되기도 전에 금지된 살충제 성분이 달걀에서 대량 검출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공장식 사육농장’(CAFOs·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환경분야 전문 연구조사기관인 ‘월드워치 인스티튜트’(WI)에 따르면 전 세계 공장식 사육농장에서 기르는 가축은 2000년 150억마리에서 지난해 240억마리로 증가했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가금류의 72%, 전체 달걀의 42%, 돼지의 55%가 CAFOs에서 길러지거나 생산됐다. CAFOs는 영국 등 유럽에서도 급증하고 있다. 저비용·고효율이라는 특징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대규모 항생제 사용으로 내성이 커지는 등 전 세계 인류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난달 영국의 헤리퍼드셔 지역에 위치한 한 대형 공장식 농장에서 수만마리의 닭이 모이를 먹고 있다. 가디언 캡처 |
21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비영리 민간탐사 언론단체인 ‘탐사보도국’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영국 전역에 최소 789개의 CAFOs가 운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6년 새 26% 급증했다. 영국의 가축농장 하면 여러 가축들이 초록의 들판을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떠올리겠지만 실상은 회색 창고 안에 수천, 수만 마리의 가금류나 돼지가 움직일 틈도 없이 밀집한 풍경을 볼 수 있다고 가디언은 꼬집었다.
특히 가금류 농장의 경우 규모가 큰 상위 10개 중 7개가 100만마리 이상의 닭이나 오리 등을 키우고 있고, 돼지는 최대 2만3000마리가 CAFOs에서 길러지고 있다. 소는 3000마리까지 밀집 사육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좁은 공간에 가축들이 모여 있다 보니 소음과 악취, 오물로 인한 수질오염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농장 주변에 사는 주민의 고통도 심각하다. 2000㎡ 규모(약 600평)의 헛간마다 각각 4만2000마리의 닭을 키우는 헤리퍼드셔 지역 농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 사는 한 주민은 소송을 고려 중이다. 그는 “하루 종일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정원 가꾸기 등 야외활동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CAFOs 규모가 확실하지 않다 보니 정부 정책도 미흡하다. 농장 대부분이 기존 시설을 확장해서 사용해 당국에 CAFOs으로 분류되지 않은 곳이 많다. 영국 정부도 CAFOs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수집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여러 문제에도 밀집 사육이 늘어나는 이유는 전 세계 육류 소비와 운영 비용이 덩달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가금육 생산은 2011년 68억616만마리에서 2014년 73억9025만마리로 증가했다. 아시아 지역의 달걀 생산량은 2011년 43억6152만개에서 3년 만에 46억6468만개로 늘었고, 가금육 생산 역시 269억2961만마리에서 290억1276만마리로 증가 추세다.
이와 관련해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FRA) 관계자는 “영국에서 동시 사육되는 가금류는 1억7300만마리로, 연간으로는 10억마리에 달한다”며 “이를 모두 자연방사 기준에 맞춰 키우려면 덴마크 코펜하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다 유기농 방식으로 같은 규모의 가금류를 사육하려면 서울시 크기와 비슷한 영국 웨일스 서북부섬 앵글시 면적(약 710㎢)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환경운동가들은 영국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이후 국제교역에서 가격경쟁 우위에 서기 위해 더 많은 밀집 사육이 추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간 영국 농장의 규제 기준은 과거 EU 기준보다 높았지만 지금은 EU와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다. 향후 영국이 EU를 탈퇴한다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금보다 더 낮은 규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동물복지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EU도 밀집 사육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하고 있다. 2003년부터 닭들을 닭장 안에 일렬로 빽빽하게 세우는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 신축을 금지하고, 순차적으로 그 대상을 다른 가축 농가로 확대했다. EU는 배터리 케이지보다 조금 넓은 ‘개선된 케이지’ 사용을 허가하고 있지만, ㎡당 최소 닭 13마리가 사육되기에 역시 밀집 사육 범주에 속한다.
◆“밀집 사육이 가축의 항생제 내성 높여”…인류 건강에 직결
좁은 철창 안에 갇혀 스트레스와 약물에 시달린 가축이 인류에 끼칠 유해성에 대한 경고도 이어지고 있다. 밀집 사육을 줄이기 위해 생산부터 유통까지 총체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FAIRR는 아시아의 CAFOs에서 사용한 항생제 양이 지난 10년간 두 배 이상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아시아 지역의 가금류 및 돼지 농장에서 사용되는 항생제는 2030년까지 120%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결국 인류의 항생제 내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일각에선 가축의 고통을 담보한 제품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품질 높은 축산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기 위해 유통업체들이 앞장서자는 주장이다. 영국 대형 유통업체인 세인스버리와 막스앤스펜서 등이 이미 매장에서 밀집 사육한 달걀 판매를 줄이기 시작했고, 미국 유통업체인 월마트와 테스코도 비슷한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전했다.
무조건적인 방목보다는 공장식 사육농장에서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영국 브리스톨대 크리스틴 니콜 수의학과 교수는 “작은 농장의 가축이 오히려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농장 크기나 야외 방목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며 “가축이 가장 필요로 하는 스트레칭이나 몸다듬기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 공장식 농장에 마련된다면 질병 위험이 낮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농장주들이 이런 환경으로 개선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