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26일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과 조찬을 마친 노무현 대통령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정부 때 외교장관을 지낸 한 전 장관이 2002년 대선 때 기호 2번이었던 자신이 아닌, 1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날 조찬은 당시 청와대 비서실에서 초대 주미대사로 한 전 장관을 추천했으나, 임명권자와 한 전 장관이 일면식도 없던 터라 면접을 겸해 마련됐다. 노 대통령의 인물평을 듣는 순간 정찬용 인사수석은 다른 후보를 물색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한 전 장관을 주미대사로 임명한다.
김대중(DJ) 대통령도 초대 주미대사로 이홍구 전 총리를 기용했다. 노태우정권에서 국토통일원 장관, 김영삼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 전 총리는 두말이 필요 없는 보수 인사다.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 대표를 거쳐 199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나섰으니 어찌보면 DJ에게는 한때 정적이기도 했다.
박창억 정치부장 |
‘자기 사람’을 써야 하는 자리가 있다. 청와대 비서진이나 국정원장 등 권력 기관장에는 ‘코드인사’를 고집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미대사 같은 해외 공관장이나 과학기술 분야 고위직까지 ‘캠프 출신’을 고집하면 그 정부의 인사는 폐쇄적이고 협량하게 비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민께서 역대 정권을 통틀어 가장 균형인사, 탕평인사, 그리고 통합적인 인사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다”고 자평했다. 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에 친문(친문재인)이 아닌 인사들을 일부 등용한 것을 가리키는 발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경환 전 법무, 조대엽 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와 김기정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등 캠프 출신과 박기영 본부장 등 노무현정권 사람을 고집하며 문 대통령의 인사는 빛이 바래고 있다. 세계일보가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각계 전문가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혹평을 받은 분야가 인사다. 노무현정부에서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과 같은 시기에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전 의원은 통화에서 문 대통령의 ‘탕평인사’ 발언을 놓고 “벌써부터 오만한 끼가 보인다”고 꼬집기도 했다.
양(洋)의 동서(東西)와 시(時)의 고금(古今) 을 막론하고 성공한 지도자는 탕평을 중시했다. 링컨은 자신을 “긴팔원숭이”라고 놀린 민주당원 에드윈 스탠턴을 육군장관에 앉혔고, 당 태종 이세민은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위징을 중용했다. 문 대통령이 진짜 탕평을 하려면 ‘1번 찍었을 사람’만 찾지 말고, 자유한국당·바른정당 인사를 포함해 널리 인재를 구해야 한다. 취임사에서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서 일을 맡기겠다”고 다짐했던 문 대통령이 점차 ‘초심(初心)’을 잃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박창억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