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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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서 악마로~DDT의 추억'…이, 뇌염 퇴치 1등공신서 판매금지· 살충제 달걀 왜?

위생상태가 불량하던 1950년대 초반,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DDT를 직접 몸에 뿌리는 모습.  
피프로닐, 베펜트린 등 살충제 성분이 든 달걀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젊은 세대에겐 생소한 DDT까지 등장했다.

경북의 일부 닭농장 달걀과 닭에서 절대 나와선 안될 DDT성분이 검출됐다. 

농장주는 "DDT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다"며 억울함과 분통에 주저 앉았다. 전문가들은 40여년전 과수원 해충박멸용으로 사용한 DDT가 땅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잔류성분이 남은 결과(땅이 흙, 모래를 먹고 달걀로 연결)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사실 DDT는 1960년대까지 우리 생활에 밀접한, 익숙한 고마운(?) 존재로까지 여겨 졌다.

▲ 이, 모기 잡는 특효약에서 38년전인 1979년 판매금지 돼 

위생상태가 불량하던 시절 이는 큰 골치거리였다.  이는 사람 피를 빨아 먹고 티푸스를 옮긴다.  가렵고 습진이 생기게 만들지만 워낙 작아 잡기가 까다로웠다.

오죽 잡기가 힘들면 '이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속담까지 나왔을 까. 

이러한 이도 DDT(디클로로 디페닐 트라클로로에탄)앞엔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DDT는 유기염소계열의 살충제로 이가 옮기는 티푸스나 모기에 의한 말라리아 퇴치 특효약으로 한 때 전세계적을 각광을 받았으나 치명적 부작용이 밝혀짐에 따라 퇴출당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9년 판매금지된 이후 일부 화학실험실에서나 희미하게 존재를 찾을 수 있다.

▲ DDT 사용법으로 노벨 생리학상까지

DDT는 1874년 자이들러(O.Zeidler)가 처음 합성됐지만 자세한 효능은 알지 못했다.

1939년 스위스 과학자 뮐러(P. H. Muller)가 강력한 해충 박멸효과가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공으로 뮐러는 194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2차대전 당시 미군 훈련프로그램 중에는 DDT 사용법도 있었다. 
▲ 2차 대전때 미군, DDT 사용 홍보까지

이가 옮기는 발진티푸스는 사망률이 20% 정도에 이르는 치명적 질병이었다.

1915~1922년 사이 러시아 지배아래 있었던 동폴란드에서 3000만명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300만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난민수용소, 포로수용소, 감옥 등 사람들이 밀집되고 위생상태가 나빴던 곳에 발진티푸스가 유행했다.

DDT가 이(爾)를 죽여 티푸스를 예방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미군은 포로수용소 등지에 백색가루인 DDT를 분말, 액상  형태로 뿌려댔다. 또 DDT를 몸에 뿌리는 방법까지 교육했다. 

항공방제 장면. 말리리아를 옮기는 모기 박멸에 DDT이상가는 약이 없기에 DDT 제한 사용이 일부 연구되기도 했다.
▲ 뇌염 나돌자 정부가 나서 미군에 'DDT 항공살포' 호소

1949년 여름 유행성 뇌염이 전국을 휩쓸자 보건부는 'DDT를 뿌려 달라'며 주한미군에 요청했다.

1949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유행성 뇌염환자가 1400명, 사망자가 273명에 달하고 있다"고 심각한 실상을 알렸다. 그러면서 "보건부가 '주한미군이 비행기로 DDT 공중살포한다'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희소식을 전했다.

▲ 고작 장독 덮어라는 주의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엔 DDT살포가 잦았다. 모기, 이를 몰아내는데 DDT만큼 좋은 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9년 5월 7일 동아일보엔 "10일부터 서울시 일원에 공군과 육군 화학부대 협조 얻어 DDT 공중살포를 하니 '장독'과 '양봉'피해 없도록 주의해 달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지금의 황사주의보 정도에 그쳤다 .

▲ 미군이 뿌린 DDT값을 동사무소가 주민에게 받아내 딴 주머니 차기도

1955년 2월 15일 동아일보는 "대구 북내동서 미군 DDT 살포 요금을 징수했다"라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면서 "DDT를 뿌린 미군도 아닌 동에서 왜 돈을 받았는지, .대동강물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이다"고 어이없어 했다.

1945년 모기퇴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보건당국이 해변에서 DDT를 뿌리고 있다. 아이들은 위해성도 모른체 이를 따라 가는 것이 마치 모기약차를 따라 가던 1950~170년대 우리들 모습과 닮았다.  
▲ 1955년 WHO가 말라리아 퇴치위해 DDT 적극권유

말라리아로 골치를 앓던 국제건강기구(WHO)는 1955년 전 세계적인 말라리아 추방계획을 세워 DDT를 적극 권장했다.

이후 말라리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다.

▲ 1962년 침묵의 봄 출판이후 1970년대 DDT 추방

DDT독성이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지적이 1957년부터 일기 시작했으며 1962년 생태학자 레이첼 카슨(1907~1964)이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라는 책을 통해 'DDT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생태계가 파괴돼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다'라며 위해성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연구가 급속도로 이뤄져 인체에 흡수될 경우 쉽게 배출되지 않고 남아(반감기 50년 이상) 암을 유발하거나 간이나 신장에 해를 끼치고 감각이상·마비·경련 등을 일으키는 맹독성 물질임이 널리 알려졌다.

1970년대 들어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DDT를 추방했고 우리나라도 1979년 시장에서 몰아냈다.

DDT는 '오렌지색 비'로 알려진 고엽제(DCB)등과 함께 환경과 인간 모두를 말라 죽이는 악마가 됐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