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도티 지음/변용란 옮김/오퍼스프레스/2만4000원 |
‘20세기 요정’이라는 오드리 헵번(1929~1993)의 이야기다. 세계적으로 화려한 은막의 스타였지만, 생의 마지막은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활동과 더불어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삶으로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타인에게 원치 않는 피해를 입힐 상황을 고려해 자서전을 남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책은 오드리 헵번을 대신하여, 그녀의 아들 루카 도티가 쓴 회고록이다. 루카 도티는 오드리 헵번과 두 번째 남편인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현재 오드리 헵번 아동기금의 대표로 있다. 그녀의 영화 스틸컷, 저자와 오드리 헵번의 지인들이 소장해온 250여 점의 비공개 사진들도 이 책에 담겼다.
오드리 헵번은 안네 프랑크처럼 생명의 위협 속에서 나치 전쟁을 겪고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하지만 인생 황금기에 그녀만큼 행복함을 만끽한 여성도 드물다. “나는 내가 바라마지 않던 대로 로마에서 가정주부로 지냅니다. (중략) 나는 할리우드에도, 다른 어느 곳에도 절대 속할 수 없지만, 마침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1979년 이탈리아 로마에 머무르던 배우 오드리 헵번이 남긴 글이다. 당시 그녀 곁에는 남편 안드레아 도티와 9살 아들 루카 도티가 있었다.
배우 오드리 헵번은 세계적으로 화려한 은막의 스타였지만, 생의 마지막에는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와 아프리카 빈민구제 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사진은 1968년 이탈리아 질리오에 위치한 가에타니 집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으로 남편 도티가 찍은 것이다. 오퍼스프레스 제공 |
초콜릿을 손에 넣게 되는 날에는 마지막 조각이 없어질 때까지 한꺼번에 먹어치웠다. 아들은 “말썽꾸러기 악동에나 걸맞을 태도로 게걸스레 아이스크림을 먹어댔다”고 기억해냈다. 책에는 헵번이 즐겼던 50가지 요리법이 줄지어 등장한다. 레드 치킨, 터키식 농어 요리, 초콜릿 케이크, 버섯 소스 송아지고기 찜, 빵가루를 입힌 커틀릿, 바닐라 아이스크림 등….
저자는 네덜란드에서 자란 소녀가 할리우드 스타가 되고, 이탈리아의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구호활동을 하면서 노년을 마무리한 과정을 부드럽게 풀어낸다. 네덜란드를 덮친 전쟁과 기근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헵번은 평생 전쟁을 끌어안고 살았다고 아들은 기억한다. 어릴 적 저금한 돈으로 작은 시계를 산 아들에게 헵번은 갑자기 화를 냈다. 시계를 제조한 독일 회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들의 강제노동으로 이윤을 얻었다는 사실을 도티는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아들은 “어마어마한 검정 드레스와 큼지막한 선글라스 뒤에 감춰진 참모습”이라고 고백했다.
이 책에는 50가지 레시피 안에 오드리 헵번의 생애가 펼쳐진다. 초콜릿은 전쟁으로 인한 배고픔을 채워준 기억의 도구였다. 그녀는 자녀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초콜릿 케이크를 손수 만들었다. 헵번 가족들의 내밀한 추억과 사연이 담긴 50가지 에피소드가 함께 담겨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